(3)세계가 경악한 올림픽 유치|바덴바덴의 환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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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2차 대전 당시 대규모 미군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까닭에 전쟁의 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인구 4만의 서독 휴양도시 바덴바덴.
1981년 9월 27일 밤 10시. 산장풍의 호텔 피시 쿨트르 4백11호실에서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4명의 신사들 표정은 미소를 띠고 있으면서도 긴장된 분위기를 품기고 있었다.
88올림픽 서울 유치 사절단 중의 한 사람인 이 방의 주인 최만립 대한올림픽위원회 (KOC) 명예총무,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IOC의 모든 행사는 그가 주최하는 파티가 끝나야만 공식 일정이 모두 마감된다」는 세계적 스포츠 용품메이커 아디다스의 홀스트 다슬러 회장, 그리고 세계복싱연맹(AIBA) 초드리 사무총장.
정 회장『올림픽 서울유치를 위해 당신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슬러『그렇습니다. 미주지역 TV중계권에 대한 협상권과 올림픽 후원사업에 참가할 해외기업 선정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42표 정도를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최 총무『당신이 말한 42표 중에는 서독의 바이츠 위원과 영국의 엑세터 위원, 루크 위원, 그리고 프랑스의 헤조그 위원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다슬러『불행하게도 그분들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최 총무『아니 그런 핵심 멤버들을 빼놓고….』
실망으로 얼굴이 상기된 최 총무의 오른팔을 정 회장이 가만히 붙잡았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미뤄 이 사람은 믿을만한 것 같소이다.』
투표일을 나흘 앞둔 비밀협상은 이렇게 끝이 났다.
당초 한국의 올림픽 유치신청은 아시안 게임유치를 위한 일종의 양동 작전이었다.
5공화국이 출범한 후 80년 4월 당시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86아시안게임 유치신청서를 아시아 올림픽평의회(OCA)에 제출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인 6월 박 회장은 정화선풍에 밀려 사임했고 대규모 숙정 작업이 끝날 무렵인 9월께 이규호 문교부장관은 『올림픽 마저 유치하자』는 당시로는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계획을 입안, 남덕우 총리와는 사전 협의도 없이 대통령에게 곧바로 재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내각에서조차 지원을 받지 못하는 올림픽 유치계획은 IOC에 유치신청만을 접수시켜 놓은 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경쟁도시인 일본의 나고야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 「88나고야올림픽」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분위기였다.
김택수 IOC위원마저 유치대책회의에서『서울과 나고야가 표 대결에 들어가면 서울 표는 내 한 표뿐일 것』이라고 극언할 정도였다.
정부는 따라서 81년5월 대책회의를 열고 『표 대결에서 체면이 설만큼의 서울지지표가 나오기만 해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지극히 소극적인 결론을 내리고 9월의 총회 때까지 체면치레용 유치활동을 펴기로 방침을 정했다.
정수영씨를 정점으로 하는 올림픽 유치준비위원회가 롯데호텔에서 처음으로 회동한 것은 7월 중순.
불과 한달여의 준비 끝에 김택수 IOC위원, 김운용 세계태권도 연맹총재, 전상진·최만립 KOC부위원장 등 4명의 올림픽 콩그레스 대표를 비롯, 박영수 서울시장을 단장으로 한 조상호 KOC위원장, 유창순 무역협회장 등 6명의 공식대표, 최원석 동아그룹회장,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조중훈 KAL회장 등 재벌총수들로 구성된 16명의 민간지원단, 그밖에 이선기 국무총리행정 조정실장, 이연택 제1조정관 등 정부 실무진을 포함한 16명의 일반 지원단 등 1백 여명에 가까운 유치단이 9월18일 마침내 서울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세계를 경악시켰던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투표결과 발표 『서울52, 나고야27』로 판가름난 『세울-꼬레아』가 나오기까지의 믿기 어려운 드라마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서울올림픽은 물론 86아시안게임마저 반대하던 셰이크파히드 쿠웨이트 NOC위원장이 일본의 기요카와 IOC위원과의 개인감정으로 태도가 돌변, 투표일을 1주일 앞두고 최소한 5명 이상의 중동지역 IOC위원들과 연합전선을 펴 서울을 지지했다는 얘기, 또 한국이 분단국가이고 개발도상국가라는 명백한 핸디캡이 오히려 IOC위원들의 모험심을 자극했다는 풀이 등이 모두 근거가 있든 없든 한국에겐 행운이요, 천운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21세기초가 지날 때까지 돌아올 수 없는 실낱같은 기회를 한국은 붙잡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판단을 내린 IOC 및 전 세계 스포츠계의 양식과 용기는 결과적으로 인류역사를 빛낸 훌륭한 업적으로 승화됐다. <김인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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