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꽃의 말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참으로 미안한 말씀이지만, 하루 종일 내가 한 일이라곤 산국이며 구절초 꽃을 찾아다닌 것뿐입니다. 그토록 가을꽃들을 찾아 헤매도 나는 결국 꽃이 아니었지요.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와 문득, 돌담 아래 키 낮은 동백나무를 바라보니 어느새 꽃봉오리들을 맺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동백은 저 혼자 온몸으로 꽃봉오리들을 만들고 있었지요. 하지만 꽃이 피려면 빨라야 석 달. 먼저 흑산도나 보길도의 동백이 꽃 소식을 전해오면 여수 오동도의 동백이 받아서 넘겨주고, 마침내 우리 집의 꽃봉오리도 붉은 혀를 내밀겠지요. 하지만 널리 알려진 선운사 동백꽃은 춘삼월에야 피어나니 동백이 아니라 '춘백'입니다.

절정의 꽃은 더불어 푸른 잎들이 있어 아름답고, 지난한 세월이 있어 더 아름답지요. 과정을 무시한 채 꽃시절만 꿈꾼다고 꽃이 피겠는지요. 가신 지 오래지만, 칠순 잔치의 어머님이 절정의 꽃이었다면, 하객들의 박수는 푸른 잎이었지요. 그대가 일평생 피워야 할 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대의 장례식장에 배달되는 조화만큼입니다. 아시겠는지요?

이원규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