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철거가 주는 교훈|이기탁<연세대교수·국제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중부유럽」은 무너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역사적인 전제가 필요하다. 「독일문제」의 기원은 유럽의 근대사와 함께 시작한다.1815년 나폴레옹의 패권이 몰락한 후 영국은 유럽의 정치적 재편성에서 「중부유럽의 강화」를 통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견제하려한 「2중 장벽」의 원리를 채택했다.「중부유럽의 강화」는 곧 독일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비스마르크이래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세계를 격동시킨 진앙이 되어왔다. 그러나 얄타협의에서 「전후 유럽의 해결」원칙으로 게르만에 중앙집권을 허용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역사는 반전되어 「중부유럽의 무력화」로 나타났다. 즉 「독일의 분할에 의한 약화」를 기초로 하여 오늘의 유럽이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제 다시 그 질서가 게르만민족의 실력으로 무너지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문제에는 두 가지의 엄격한 질서가 내재하고 있다. 그 하나는 「냉전」이라는 원칙과 또 하나는 게르만에 중앙집권을 다시는 허용할 수 없다는 독일의「분할」및「약화」라는 유럽의 고전적인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을 웅변적으로 나타낸 것이 10일 서독국회가 프로이센의 전통을 노래하는 융장한 「전전국가」를 일제히 일어나서 불렀다는 점과, 그리고 동독의 자유민주선거를 내용으로 하는 민주화개혁의 선포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즉 『너희들이 게르만을 둘로 갈라놓고 살라고 하니까 나뉘어서 살기는 한다. 그러나 어느 누가 게르만민족을 갈라놓을 수 있는가』하는 배짱을 가지고「일민족 두국가」(Zwei staaten aut eine Nation) 정책을 밀고나간 결과 오늘의 동·서독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문제에서「냉전」과 유럽의 「고전적 해결」간에는 이율배반적인 문제가 깊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번 소련 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동독방문에서 저항하는 호네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를 강요했다. 소련이 창출시킨 강철같았던 동독의 관료적 사회주의를 소련 스스로가 무너뜨린 것이다. 여기에서 발생한 문제의 하나가 동독의 「민주화」다. 실제 전후 절망적인 분단상황에서 시작한 아데나워의 통일정책은 동독이 민주화 할 때에 독일통일이 가능하다고 예언했으나 지금 결과적으로 민주화를 통한 독일통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독의 민주화를 통한 통일에의 접근은 역으로 또 하나의 독일문제 원칙인 고전적이며 유럽적인 문제, 즉 게르만민족에 중앙집권을 허용할 수 없다는 문제를 파생시킨다.
유럽국가들, 특히 프랑스의 미테랑은 『독일통일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유럽의 동서 어느 나라도 현재로서는 독일통일을 바라는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동독의 「민주화」로「 냉전」이 완화되면 될수록 역으로 고전적인 문제로서의 「중부 유럽」문제는 팽창하는 것이다.
동서간의 합의 없이 독일의 통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지금 동독에서 야기되고 있는 변화의 본질은 동독의「민주화」이지 독일의 통일은 아니다. 독일의 통일은 또 하나의 시간과 협상을 필요로 하는 별도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2월초 미소간의 「지중해회담」에서 통독 문제가 협의의 한 주제로 제기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편 서독의 주도에 의해 동독의 「민주화」를 전제로 한「경제원조」를 통한 동·서독의 「경제통합」은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이 임박했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도 동독은 30만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상태에 있는 것이다. 콜총리나 동독출신인 겐셔 외무장관이 독일인의 냉정과 슬기를 호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첫째가 동독의 「민주화」문제이며 「통일」문제는 다음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독일통일문제는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게르만 민족의 민족주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냉전 청산문제」를 다룰 12월초의 「지중해회담」은 독일문제와 동시에 한반도에도 독일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충격을 줄만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깊은 충격이란 북한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적 변화를 말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김일성 이후」라는 문제의 등장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대비해야 할 일은 북한에서 「김일성 이후」라는 충격으로 한반도의 남북한 관계가 받게될 동요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된다.
지금의 유럽을 휩쓸고 있는 변화는 고르바초프의 동·서독 방문시 「고르비」를 부르며 환호하게 한 그의 「공동체 유럽」의 구상에서 출발한다. 한반도 문제에서도 한국전쟁을 전개했던 책임이 있는 소련이 대북한정책의 근본적인 대응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올 것인가 하는 점에서 미소간의 「지중해협상」에 우리민족이 주목해야할 이유가 있다.
눈앞에 벌어지는 게르만민족의 저력을 바라보면서 통일이라는 과정에서 전쟁을 치렀고 전쟁의 종결조차 못한 우리는 차원이 다른 우리의 현실을 지그시 밟고 침착하게 보아야 한다. 미소를 포함하여 서유럽국가는 물론 동·서독 사람들 자신들이 현시점에서 두개의 독일을 통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유럽의 경계선」을 통합하고 따라서 「두개의 사회체제」와 「군사동맹」을 통합할 게르만의 사유가 성숙했는가하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때문이다.
한반도문제도 아직 민족의문제로서 「통일」보다는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체를 해결해야할 북한의「민주화」문제가 최대의 난관이라는 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동독정부가 결의했듯이 자유롭고 「민주적 선거」를 약속한데서 보듯이 북한주민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민주화」가 남북한 통합의 출발이 된다는 점은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자 냉엄한 역사적 현실이라고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