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칼럼

영화 볼 때와 투표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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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화 '괴물'이 개봉 7일 만에 관객 400만 명을 끌어들였다. 가장 짧은 기간에 세운 기록이다. 개봉 9일째인 오늘은 500만 명을 넘길 것이라고 한다. 며칠 전 '괴물'을 상영하는 극장을 찾았다. 내가 앉은 좌석 주변은 단체로 관람 온 보험설계사들로 꽉 찼다. 중년 여성이 대부분인 그네들 자리에선 두 시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 곳곳에 장치된 유머 코드가 중.장년에게도 먹혀드는 증거였다. 1000만 관객 돌파는 시간 문제라는 예감이 들었다.

'괴물'이 깔고 앉은 코드는 유머뿐이 아니다. 판타지(괴수).가족애.환경.반미 코드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영화평론가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영화 속의 괴물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성을 압축한 상징물'로 파악했다. 실제로 괴물은 할리우드판 괴수들과 달리 한강 밖으로는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봉쇄된 괴물'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박사는 "근대성의 특징이기도 한 의료권력.생체권력을 통렬하게 풍자한 영화"라는 독특한 소감을 내놓았다. 관객은 이런 뷔페 식단에서 한두 가지만 섭취해도 배가 봉곳해진다. 덕분에 전반적으로 재미있는 영화, 괜찮은 영화라는 감상평이 쌓이고 있다.

반미영화로 볼 수 있는 요소도 '괴물'에는 많다. 주한미군 독극물 방류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든지,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퇴치한답시고 미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대목, 화염병으로 괴물에 맞서는 장면들이다. '괴물=미국'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의 딸(현서)이 죽음을 맞이할 때 미선.효순양을 머리에 떠올렸다는 사람도 있다. 작가 김탁환씨도 "기본적으로 반미.화염병 영화"라고 평가했다.

봉준호 감독이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데서 힌트(?)를 찾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민노당원=반미=반미영화' 등식이다. 봉 감독 본인은 반미영화라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지만, 감독의 평소 생각이 영화에 투영되지 않았을 리 없다. 80년대식 정서가 잔뜩 서려 있는 '386 영화'라는 지적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괴물'의 반미 측면에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따라다니다간 금세 닭 쫓던 개 꼴이 되기 십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관객의 입장이나 수준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송강호씨가 말한 '여름 더위를 식힐 초절정 오락영화'라는 자평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영화가 일단 재미있기 때문이다. 만약 미군 대신 북한 특수기관이 독극물을 한강에 풀어 괴물이 탄생한다는 설정을 했다면 어땠을까. 줄거리의 재미만으로 따질 때 분명히 지금보다 관객이 적었을 것이다. 올드 패션이니까. 영화는 그런 것이다.

예술가들은 불온하다. 전복(顚覆)을 꿈꾼다. 봉 감독과 마찬가지로 민노당 당원인 박찬욱 감독은 "내 정치 성향을 굳이 말한다면 무정부주의다. 예술가들이 대체로 이상주의적인 면이 강하고 체제에 대한 거부감도 많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현실 세계에 효과를 발휘할 만한 노선이 아니어서 차선책으로 민노당에 가입했다"는 설명이다. 박.봉씨 같은 감독들이 거침없는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해외로 뻗어가고 있다. 이들의 영상미학에 비하면 반미나 민노당은 상대적으로 초라한 변수다.

최종 심판은 관객이다. 나는 정치 지도자의 "반미면 어때" 발언에는 우려를 금치 못하지만, "반미영화면 어때"라면 영화를 보고 나서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관객은 영화와 현실을 냉철하게 구분한다. 지난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찬욱.봉준호.오지혜씨 등 문화예술인 531명이 대거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민노당은 기초단체장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대중은 영화 볼 때와 투표할 때를 가릴 줄 안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