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적´ 바이러스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조류독감.사스(SARS.중증급성 호흡기증후군).구제역.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후군) 등등.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질병의 이름이다. 공통점이 있다.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점이다. 조류독감은 A형 바이러스, 사스는 코로나 바이러스, 구제역은 구제역 바이러스, 에이즈는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이른바 에이즈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 따지고 보면 독감.간염.눈병 등 인위적 치료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오로지 지나가기만 기다리거나 면역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질병들도 대개 바이러스에서 비롯한다.

경북대 미생물학 교수인 지은이는 이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란 것이 알고 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사실 생물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울 정도로 몰골이 형편없다. 유전정보를 가진 핵산과 이를 둘러싼 단백질 껍질이 전부다. 생물이라면 의당 해야할 에너지 합성과 물질 대사, 증식에 필요한 어떤 도구도 없이 단지 숙주에 기생해 살 뿐이다.

같은 미생물인 세균은 그나마 세포로 이뤄져 있고 대사 등 생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평상시에는 아무런 기능을 못하고 물질 상태로 지내다 다른 동식물이라는 숙주 안에 기생하면서부터 비로소 생물로서의 기능을 시작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 삶과 죽음의 중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것이 변신과 적응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잘 적응한다. 변종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 1967년부터 90년까지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는 것만 20여 종이 새로 출현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인간은 바이러스 퇴치에 큰 곤란을 겪어 왔다. 세균을 이기는 항생제는 대단한 진보를 이뤘지만 바이러스 치료제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지은이는 이런 바이러스의 면면을 다양한 측면에서 소개하면서 이를 단지 '무시무시한 적'으로만 보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랫동안 사람과 공생해온 하나의 생명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생물 다양성과 공존의 철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절멸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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