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의 건강 이야기] 두 얼굴의 스테로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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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조사한 결과 동네의원 10곳 중 1곳에서 감기환자에게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의학교과서에 따르면 감기엔 스테로이드를 처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감기는 아스피린류의 가벼운 진통소염제나 기침과 콧물을 억제하는 항히스타민제 정도가 적절하다. 감기환자에게 스테로이드는 토끼 잡는 데 기관총을 동원하는 것과 같다. 스테로이드는 염증 억제 효과가 탁월한 반면 부작용이 많아 관절염이나 천식 등 감기보다 중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명의'라는 소리를 듣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스테로이드 처방이다. 스테로이드는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최강의 소염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스테로이드인 덱사메타손은 아스피린보다 100배나 강력한 염증 억제효과를 발휘한다. 수년 전 상영했던 산악영화 '버티컬 리미트'에서도 히말라야 산꼭대기에서 고립된 산악인들이 서로 덱사메타손 주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이 등장한다.산소 부족과 기압 저하로 나타나는 치명적인 폐부종엔 염증을 가라앉히는 덱사메타손 주사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스테로이드는 팔방미인의 효과가 있다. 심한 관절염 환자도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일어나 걷는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쌕쌕거리는 천식 환자로부터 피부가 벌겋게 성난 심한 피부염까지 대부분의 염증성 질환에서 스테로이드는 신속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스테로이드를 남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 스테로이드는 질병의 원인을 내버려둔 채 증상만 일시적으로 가라앉혀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속쓰림과 여드름에서 골다공증, 백내장까지 다양한 부작용을 낳는다. 면역력을 떨어뜨려 각종 감염질환에 잘 걸리게 한다는 보고도 있다. 스테로이드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잘만 사용하면 천하의 명약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스테로이드를 얼마나 처방해야 하는지 의사들의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스테로이드가 각종 민간요법을 통해 돌팔이 의사들의 비방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스테로이드는 염증을 가라앉혀 아프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얼굴에 살을 찌게 하고 피부를 뽀얗게 만들며 입맛을 돋운다. 모르는 사람에겐 영락없이 보약이다. '이 약만 먹으면 낫는다'란 비방이 있다면 불순한 의도로 스테로이드가 섞여 있는지 의심해 볼 일이다.

아울러 환자도 의사에게 단숨에 감기를 낫게 해달라고 무리하게 주문해선 곤란하다. 감기는 인체의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경고이므로 잘 쉬고 잘 먹는 것이 정답이다. 나을 때가 되면 대부분 저절로 낫는다. 필요하다면 약물의 도움을 받을 순 있지만 스테로이드는 아니다. 스테로이드에 탐닉하면 당장은 시원하게 증상이 좋아지지만 두고두고 부작용에 시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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