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앞둔 세 남편의 '1일 주부체험'

중앙일보

입력

#결혼 한달, 2년 6개월, 28년

"엄마 되고 싶은 생각 없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결혼 2년6개월째인 박선미(28.식당 운영)씨는 어른들이 보시기에 확실히 당신들과 다른 신세대다. 자식 없으면 조상께 죄짓는 걸로 알았던 어머니 세대와 달리 박씨는 "아이 안낳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 남자랑 결혼했다"고 거리낌없이 말한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사고도 명절날만 돌아오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니 두 분, 그리고 박씨 넷이서 분주하게 부엌일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TV보는 구습을 이 신세대 며느리도 고스란히 답습한다.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날 시어머니에게 "우리 친정아버지는 명절에 어머니랑 같이 부침개 부친다"고 말했다가 분위기만 싸해졌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큰 일나는 걸로 아시는 분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남편 이원석(32.무역회사 경영)씨는 "솔직히 옆에서 아내를 도와주고 싶은데 어른들 눈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결혼 한달째인 박천길(32.삼성카드)씨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남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아내 신희정(30.코리아닷컴)씨의 손을 놓지 못할 정도로 아내 사랑이 각별하지만 부산 본가에 가서 아내를 도와 부엌일을 거들 자신은 없다.

"명절날 여자들만 일하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어요. 밥상 들어주는 것만도 큰일이라고 생각했죠. 남자가 명절 때 뭘 하는 분위기가 아니니까요. 이번 설이요? 친구 만나러 나가지않고 아내 옆에 있어만 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요즘 남자들 달라졌다지만 아내 눈에는 아직 멀었다. 평소엔 어떤지 몰라도 명절엔 젊으나 늙으나 똑같다. 아니, 친정아버지보다도 훨씬 자상하지 못한 존재다.

집안 분위기가 보수적이어서, 혹은 부모님 눈 때문에 등 핑계는 다양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허리띠 풀고 밥상받는 방관자 모습이다. 차라리 결혼 28년차인 최일부(56.금원상사 이사)씨가 그나마 세 딸과 함께 아내를 돕는 편이다.

"가족은 공동체인데 혼자만 편하면 쓰나…."

말뿐인지는 몰라도 아내를 이해하는 데는 세대보다 경륜이 앞서는 느낌이다.

#남자들의 명절 증후군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눈치보느라 명절엔 '불편한 편안함'을 즐길 수밖에 없는 이원석.박천길씨가 아버지 뻘인 최일부씨와 함께 지난 19일 주부들의 명절체험을 했다.

섬유탈취제 '페브리즈' 제조사인 P&G 페브리즈가 남편을 변화시키자는 취지로 마련한 '남편이 체험하는 주부의 하루'에 아내의 강권으로 참가한 것. 남편들이 콩기름 냄새 맡아가며 전 부치는 동안 아내들은 식탁에 모여 앉아 커피잔을 앞에 두고 담소를 즐겼다.

설거지는 물론 손님맞이 청소, 더러워진 식탁보 빨래도 이날만큼은 모두 남편들의 몫이었고, 아내들은 끝끝내 담소만 나눴다. 처음엔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한다'면서 집안일이 별거냐는 식으로 행사장에 왔던 남편들은 기계로는 할 수 없는 잡다한 집안일을 하면서 고생깨나 했다.

설거지에 이불 빨래까지 발로 힘주어 눌러빤 다음에 "이 짓 또 하라면 난 못한다"는 말이 남편들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내들은 "그만한 집안일이야 명절 아니라 평소에도 늘 하는 것"이라며 "명절은 일 자체보다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어렵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명절만 다가오면 이민가고 싶다"는 자유분방한 아내나 "요리 못한다고 시어머니한테 혼날까봐 걱정"이라는 새댁, 경력 28년이 무색하게 명절만 다가오면 끙끙대는 베테랑 주부 모두 벌써부터 명절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다. 이런 마음을 남편들은 알까.

몸 편하다고 맘까지 편한 건 아니라는 게 남편들의 항변이다. 최씨는 "사실 떡국 끓이고 녹두전 지지는 거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지.

그렇지만 시댁 어른들 어려워하는 아내의 마음고생이야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스트레스 받는 아내를 옆에 두고 속 편한 남편은 없다. 한마디로 이런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남편 역시 명절 증후군을 앓는다는 얘기다.

설거지 싫어하고 빨래 널기 싫어하는 아내를 위해 식기세척기.드럼건조세탁기를 장만한 이씨지만 명절엔 아내를 쿡쿡 찌르는 역할밖에 못한다. 내심 며느리 솜씨를 보고싶으면서도 시어머니 노릇하기 싫다며 어머니는 아내에게 일을 많이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는 더 눈치를 본다. 일하지도, 그렇다고 놀지도 못하는 아내를 보면 이씨가 더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명절을 그냥 '빨간 날'로만 알았던 박씨도 겁많은 아내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됐다.

#생각의 차이가 아내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비록 짧은 체험이지만 이날의 주부 체험을 마친 후 남편들은 아내의 입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잔소리 한번 듣고 말지"라면서 평상시 집에서도 손하나 까딱 안했던 박씨는 어느새 "아내가 원하는 것을 1백% 다할 수는 없더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다른 남편들에게 조언까지 한다. "아내들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씨도 "아내가 뭘 해주기를 기대하느니, 뭐든지 내가 직접 하면 집안이 편하다"고 말했다. 최씨의 조언은 아내들의 마음 속에 더 깊숙이 파고든다. "꼭 아내가 원해서라기보다 세상 바뀌는 걸 목격하니까 뒷짐만 지고 살 수 없더라. 여자들이 변화하는 속도를 남자들이 따라잡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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