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여성들 `집밖으로` 증후군

중앙일보

입력

집에 가기가 두려운 직장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다.

가정에서 소외된 40대 이상의 남자들이나 겪는 것으로 여겨졌던 '귀가 기피 증후군'이 직장과 가정에서 이중고(二重苦)에 시달리는 맞벌이 여성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1년을 기준으로 기혼 여성의 고용 비율은 51%다. 10년 전 49%에 비해 2%포인트 늘어난 수치로, 결혼한 여자 두 명 중 한 명은 직장이 있는 셈이다.

맞벌이는 이제 당연한 시대적 흐름으로 자리잡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이나 가족 구성원간의 협력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역회사 과장인 이모(33.여.서울 구로동)씨는 귀가 시간을 늦추는 날이 부쩍 늘었다.

업무가 일찍 끝나도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볼링을 치거나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들어가곤 한다.

심지어 집 앞에 다 와서도 공원을 한바퀴 돌며 시간을 끌다 집에 들어가는 날도 있다. 이씨는 여섯살.다섯살된 두 딸과 남편,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어차피 집에 가도 맘 편히 쉴 수 없다는 생각에 밖에 있는 시간을 늘리게 되는 것 같다"며 겸연쩍어 했다.

"저녁을 차려먹고 설겆이.청소 등을 하다보면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전에 지쳐버린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육아 방법 등을 두고 사사건건 부닥치면서 시부모와의 사이가 껄끄럽게 된 것도 귀가가 늦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아이들도 저보단 할머니를 더 따라요. 시부모님 눈치보느라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갖기도 힘들고…."

과다한 가사노동, 이를 돕지 않는 남편, 함께 사는 시부모나 친정부모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일부 직장 여성들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병원에 근무하는 박모(32.여.경기도 시흥)씨도 일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에 공연히 회사에 나왔다가 밖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열살.일곱살된 두 아들, 남편, 친정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빨간날(공휴일)'이 하나도 반갑지 않다"며 "아이들과 씨름하고 밀린 집안 일을 하다보면 차라리 직장에서 일하는 평일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일주일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 친정 엄마에게 거짓말을 할 때가 있어요. 죄책감이 들지만 안그러면 정말 병이라도 날 것 같아요."

문제가 있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직장 여성들의 또 다른 고민이다. 자칫하면 '나쁜 엄마''가정을 버린 아내'로 손가락질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트레스의 가장 큰 희생자는 13세 미만의 자녀를 둔 풀타임 직장 여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연구기관인 로퍼 스타치 월드와이드가 30개국에서 1천명씩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3세 미만의 자녀를 둔 직장여성들 가운데 약 24%가 거의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혼 남성은 상습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응답이 17%에 그쳤다.

한국여성의전화 고경희 상담국장은 "한달에 30여건 정도되는 맞벌이 부부의 상담 중 거의 대부분은 아내들이 가사노동.육아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마음누리 신경정신과 의사 정찬호씨는 "여자들도 실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에 귀가를 기피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며 "가정에서 이를 용납하지 못해 이혼에 이른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용인정신병원 정신과 의사 하지원씨는 "직장에서는 남자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집안일은 고스란히 여자몫이 되는 데에 따른 상대적 손실감이나 사회적 성취욕구 등이 직장여성들로 하여금 집보다는 밖에서 머물고 싶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진단했다.

그는 "'귀가 기피 증후군'이 심각해지면 가정 생활에 위기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주변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여성개발원 가족보건복지부 장혜경 박사는 "궁극적인 해결 방안은 남녀 모두 직장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도록 보육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육아 휴직제를 정착시키는 등의 법적.제도적 뒷받침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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