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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절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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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상현 (사)코드 미디어디렉터

박상현 (사)코드 미디어디렉터

전 세계 10대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틱톡은 최근 CEO를 잃었다. 모기업인 중국의 바이트댄스가 틱톡을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시키려 영입한 미국 경영인 케빈 마이어가 취임 100여일 만에 사직서를 냈다. 미국과 중국의 힘 싸움 와중에 틱톡이 미국 기업으로 매각될 위험에 처했는데, 그럴 경우 자기 입지가 사라질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바이트댄스는 급히 새로운 CEO를 찾아 임명했다. 유튜브에서 일하다가 2년 전 틱톡으로 옮긴 바네사 파파스라는 여성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전형적인 ‘유리절벽(glass cliff)’ 인사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유리절벽이라는 표현은 원래 여성 등의 약자나 소수집단의 사람들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승진하지 못하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에서 왔다. 기업들은 잘 나갈 때는 여성을 CEO로 임명하지 않다가 해결하기 힘든 큰 위기를 맞아 조직이 위태로워지면 여성을 CEO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실패가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여성에게 최종 책임을 맡겨 비난의 표적이 되게 하고, 동시에 ‘여성 CEO를 임명하는 선진적인 조직’이라는 좋은 이미지도 얻으려는 꼼수다.

언뜻 보면 여성으로서는 비로소 유리천장을 깨고 최고 자리에 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기업이 그들을 절벽 끝에 세우는 형국이다. 제록스가 최초로 여성 CEO를 임명했을 때는 기업이 거대한 부채에 시달리며 증권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던 시기였다. 야후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며 회사에 위기가 닥치자 캐롤 바츠라는 여성을 CEO 자리에 앉혔다. 기업들은 이들 여성이 마치 구원투수인 듯 홍보하지만 사실은 패전처리 투수인 셈이다.

박상현 (사)코드 미디어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