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난 아버지의 세상에 없는 사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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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9호 20면

아버지의 사과 편지

아버지의 사과 편지

아버지의 사과 편지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령 옮김
은유 해제
심심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 #성폭력 아버지 육성 가상 복원 #정확한 사과는 진실에서 나와 #가해자 목소리 남김없이 들려줘

단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을 들려줄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나는 왜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세계에 그 말을 들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저자 이브 엔슬러는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작업을 해왔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서는 질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냈고, 여성의 이상적인 몸에 대한 질문과 자신의 암 투병기를 작업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세계 여기저기에 있는 여성들의 고통을 생생한 목소리로 옮기기도 했다. 그녀는 이러한 진솔하고 용감한 태도로 자신의 상처를 섬세하게 그린다.

그녀는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서 고통에 몸부림쳐왔다. 친족 성폭력과 정신적, 신체적 폭력의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피해자의 증언이 아닌 가해자인 아버지의 시점으로 수십 년 동안 묻어두었던 과거를 반추한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현실적으로 그는 끝내 그녀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기다림은 끝내기로 했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우주에 떠도는 한 점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그녀에게 속죄한다. 여과 없이 날 것 그대로 자신이 저질렀던 폭력에 대해 직시하고,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가부장 제도에서 자신의 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모습과 역겨운 범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증거물인 그녀가 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실이 괴로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를 경멸하는 쪽을 선택했던 지난날을 사과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서로의 슬픔이 맞닿았던 순간, 기르던 고양이가 사고를 당한 모습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미국 극작가 이브 엔슬러는 성폭력 가해자였던 아버지가 보내는 가상 편지를 썼다. 진실을 드러내 화해하기 위해서다. [사진 심심]

미국 극작가 이브 엔슬러는 성폭력 가해자였던 아버지가 보내는 가상 편지를 썼다. 진실을 드러내 화해하기 위해서다. [사진 심심]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남김없이 가해자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정당화나 변명, 숨고 싶어 하는 모습까지 재현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에서도 우리는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서사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마주한다. 그녀는 위엄있는 태도로 가해자가 ‘진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그리하여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본질을 깨닫고 정확히 피해자가 겪었던 바로 그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침내 이에 대한 진정한 사과에 이르기를 기다린다.

진정한 사과의 의미는 진실에서 나온다. 진실은 변명이나 정당화로 감출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적확한 인식만이 의미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섬세하게 자신의 폭력을 해부하고, 자신으로 인해 피해자가 느낀 바로 그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슬프지만 우리는 언제나 듣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상처 앞에서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내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은 결코 볼 수 없는, 상처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상흔을 마침내 가해자의 언어로 재현했다는 것. 그렇기에 이것은 진실이고, 불가능한 영역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진정한 사과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끝내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 듣고 싶었던 바로 그 사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는 사과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내가 사과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상처 받을 때마다 고통스러워 한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혼자 있는 기분이 편안해질 때가 찾아오고, 그 편안함이 지나면 숨 쉬는 게 못 견딜 만큼 외로워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길. 내가 닫아버린 저 문을 다른 누군가가 열어주기를 기다린다. 이 책은 나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처럼 같은 고통을 겪은 여성들에게.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의 문을 열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더는 서로를 잃고 싶지 않다. 상처받은 여성이 사과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 폭력의 굴레가 마침내 사라지기를.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장희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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