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올 여름 메밀꽃 필 무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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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야마(富山)현의 도가(利賀)촌은 일본 사람도 잘 모른다. 지방 지도에조차 가는 길도 나와 있지 않은 첩첩산중 빈촌이다. 주민들은 도시로 떠나고 폐촌 지경에 이르렀던 마을이, 그러나 요 몇년 사이 서서히 명소로 바뀌고 있다.

여름이면 이 깊은 산골에서 놀랍게도 세계 연극제가 열린다. 30년 전 스스키씨가 헌집을 빌려 시작한 것이 이제 세계 연극인에겐 꿈의 무대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엔 국제 메밀축제에 13만명이 다녀갔다. 그뿐 아니다. 계절마다 열리는 마을 축제를 민속계에선 보물처럼 여기고 있다. 아랫마을 합장가(合掌家)는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우리 일행이 두길 넘게 쌓인 눈 터널을 뚫고 도착했을 땐 다음날부터 열리는 메밀축제 준비에 모두들 정신이 없었다. 계속 내리는 폭설을 치우는 일만도 보통이 아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거대한 설상(雪像)들, 메밀국수, 떡, 온갖 민예품, 그리고 눈 무대 위엔 민요와 춤, 민속놀이가 진행되고… 밀려드는 손님맞이에 모두가 땀을 흘린다.

"행사 요원이 몇명입니까?"
"1천명입니다. "
"전체 주민은?"
"1천명!"

촌장은 스스럼없이 그렇게 답했다. 주민 전체가 동원됐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온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손이 모자라 1인 3역, 4역을 맡는다.

눈을 치우던 꼬마들이 차례가 되자 바쁘게 무대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곤 가무를 선보인다. 국수를 만들던 아줌마도 제 차례가 되면 앞치마를 벗고 무대로 달려간다. 모두가 한 마음, 주인이요 주역이다.

그날 하루 찾아온 손님만도 1만3천명, 수익은 얼마일까.

촌장은 마당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화합" 이라 답했다. 그리곤 "오신 손님들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수익입니다. "

이 대목이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마을은 지금도 재정 자립도 10%뿐 나머지 90%는 읍.도.중앙정부에서 보조를 받고 있다는 것. 따라서 산 아래 도시 주민들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그 많은 축제를 연다는 것이다.

푸른 숲, 맑은 공기, 그리고 물도 맑게 지켜 여름이면 도시 사람들이 천렵도 하고 또 도시에서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야 한다. 폐교된 학교 건물도 옛날 그대로 보존, 지금은 실비 숙소로 쓰고 있다. 학교 간판, 현관에 교가, 교실마다의 반 표지, 음악실의 음악, 누구나 옛 향수에 젖을 수 있게 모든 건 옛날 그대로다.

생활이 불편해도 참고 견뎌야 하며, 모두들 열심히 성심껏 한다는 걸 도시인들에게 보여 감동을 주어야 한다. 90%를 보조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 그 많은 우리 축제는 무엇을 위해 열리는 걸까.

과연 이들의 진지한 노력이 감동적인 결실을 가져왔다. 양 골짝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산 속에 터널로 길을 뚫었고, 초.중생 1백명도 안 되는 학교는 웬만한 대학 캠퍼스를 능가한다. 규모에서, 시설 내용에서 일본 최첨단 학교다.

그러나 학생 규율은 엄격하다. 산중턱에서 내려 언덕길 2㎞는 걸어서 통학이다. 길에 쌓인 눈 속에 반바지 차림으로.

우리 일행은 젊은 공무원.마을 청년회.유지들로 구성된 봉평의 효석문화재 주역들이다. 올해 3회를 맞는 효석문화재는 문학.메밀.달밤.시골길.장꾼, 그 어떤 축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절묘한 한국적 정서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도가촌을 찾은 건 보다 멋진 축제를 위한 연구 수업이다.

내가 놀란 건 이들 젊은이의 진지한 연구자세였다. 눈 속을 헤집고 온종일 축제 현장을 지켜보고 밤엔 또 늦게까지 그 곳 직원들과 의견교환을 한다. 이 산골까지 자비를 들여, 제 고장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내겐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화려한 축제 뒤엔 이렇듯 땀에 젖은 숨은 손길이 있다는 걸 누가 알까.

도가촌의 기적이 이루어지기까지엔 특히 그곳 동사무소의 나가다니 과장을 축으로 한 젊은 혈기와 헌신적인 봉사 덕분이라고 한다. 그의 휴먼 스토리는 우리 일행에겐 충격이요, 감동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올 여름 메밀꽃 필 무렵이면 우리 젊은 주역의 화려한 결실이 봉평골에 활짝 필 것이다. 설렘 속에 그 날을 기다리며.

李時炯(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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