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軍 강정해군기지 반대 글 삭제 위법 안해”…원심 파기환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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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해군이 홈페이지에 올라온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글 100여건을 삭제한 것에 대해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항소심에서는 국가가 원고들에게 1인당 30만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는데 5년여 만에 뒤집혔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해군 홈페이지가 정치적 논쟁의 장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해군 본부의 삭제 조치가 위법한 직무집행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사건을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로 돌려보냈다.

일괄 삭제된 건설 반대 글…“표현의 자유 침해”주장

2011년 6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사업 찬반 논란이 일었을 때 원고 박모씨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이 해군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주로 해군기지 건설사업에 반대한다는 항의 글로 하루 게시 건수가 100여건에 달했다. 해군 본부는 홈페이지 운영규정 등에 따라 이 게시물을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 등에 해당한다고 보고 글을 일괄 삭제했다. 그러자 글쓴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 “청구 기각”→2심 “과실 인정”

1심은 담당 공무원들이 원고들의 항의 글을 해군 홈페이지 운영 규정에서 삭제 사유로 정한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로 판단해 삭제한 조치에는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심은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2심은 국가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2심은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넓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경우’로 글을 삭제할 때 보다 한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특정 정파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직접 포함돼 있어야 해당 조항에 따라 삭제 사유가 된다고 볼 수 있고, 원고들의 글은 이에 해당하지는 않으므로 글을 삭제한 공무원의 과실이 인정된다고 봤다. 2심은 국가가 원고 1인당 위자료 3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 “글 삭제, 위법한 직무집행 아냐

대법원은 이를 다시 한번 뒤집었다. 먼저 대법원은 "원칙적으로는 국가기관이 관리ㆍ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정부 정책에 찬성 또는 반대하는 내용의 글이 게시됐다고 해서 이를 선별적으로 삭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정부 정책에 대해 정치적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자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원칙과 글을 삭제한 공무원의 행위, 이로 인한 국가 배상의 책임은 별개라고 판단했다.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려면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나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법원은 “원고들이 항의 글을 쓴 곳은 해군 홈페이지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에 비춰 해군 홈페이지가 정치적 논쟁의 장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위법한 직무집행이 아닌 근거를 들었다. 그러면서 원고들이 100여건이 넘는 글을 하루에 게시한 행위를 ‘인터넷 공간에서의 항의 시위’ 성격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현행법에는 국가 기관이 인터넷 항의 시위 ‘결과물’인 100여건의 게시글을 영구히 또는 일정 기간 보존할 의무를 부과하는 법령상 규정은 없다"며 공무원이 이 글을 지운 것이 위법한 직무집행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글 삭제 조치는 인터넷 항의 시위의 ‘결과물’을 지운 것일 뿐, 반대의견을 표출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거나 제재한 것은 아니므로 원고들의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에 대한 제한 정도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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