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속으로 사라진 김형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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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 부장을 7년이나 지내며 막강한 권력과 힘을 자랑했던 남산 돈까스 김형욱.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에게 '권력무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파리에서 실종된지 20여년이 흐른 오늘. 그의 일생을 돌아보자.

63년 5월 6대 민정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JP등 2인자그룹과 야당·학생등 반대세력을 누르고 3선개헌의 권력가도를 내달려야했다. 이 사명을 떠맡은 이가 4대 중앙정보부부장(63년 7월~69년 10월) 김형욱이다.

김형욱의 별명은 '남산멧돼지''돈까스'였다. 특기는 물불 안가리는 저돌적인 추진력. 김형욱의 정보부는 '각하보위작업'에 정신없이 매달렸으며 대표적인 것이 JP봉쇄·탄압이다. 64년~68년초 육군방첩부대장(現기무사령관)을 지낸 윤필용 前수경사령관은 "김형욱이 JP를 죽이려고까지 했다"고 증언한다.

이 시절 윤필용방첩부대의 테러와 어우러져 정보부는 공포정치의 연출자였고 김형욱은 '권력의 마왕' 같았다. 여당내 朴대통령 반대파뿐만 아니라 야당·언론계·학생운동권 인사들이 정보부의 칼끝에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였다. 그는 69년 6월13일 국회에서 "정보부가 3선개헌음모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다. 김형욱 부장은 제2의 최인규가 되고 싶은가"라고 질타했다. 6일후 金총무는 상도동 자택앞 승용차안에서 괴한 들로부터 초산테러를 당하게 된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정보부와 악연을 맺기 시작한 것도 김형욱 부장 때였다. 65년 7 월 민중당대변인 김대중의원은 국회에서 정보부의 도청·미행등 정보정치를 규탄한 것이다.

정보부가 대공·공안사건수사에서 뚜렷한 결과를 산출하기 시작한것도 김형욱 시대다. 정보부는 64년 8월 6.3사태의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이른바 인혁당을 검거했다며 도예종씨를 비롯한 혁신계인사 등 41명을 구속했다. 이 들중 2명만이 1심유죄를 받아 이 사건은 무리한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인혁당파문은 꼭 10년후 김재규 부장 때 되살아났다. 민청학련의 좌익배후로 지목돼 都씨등 관련자 8명이 전격적으로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인혁당은 정보부가 다뤘던 사건중 가장 살벌했던 것이었다.

정보부의 대공사건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67년 7월 '동베를린거점 간첩단'이다. 음악가 윤이상·화가 이응로씨와 교수·학생 등 1백4명이 구속된 60년대 최대규모의 간첩단사건이다.

69년 12월 3선개헌이 완료되고 권력이 착근했을 때 '남산멧돼지'는 팽(烹) 당했다. 그는 71년 공화당전국구라는 감투를 받았으나 정신병에 가까울 정도로 불안을 느꼈다. 지은 죄가 많아 보복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는 결국 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고 유신철폐와 反박정희를 외치며 미 의회에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등 배신자의 길을 걷다 79년 10월 파리에서 미궁의 실종을 당했다.     <중앙일보 1995년 9월 27일 金 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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