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여론 악화 … 궁지 몰린 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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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대학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이스라엘의 카나 공습을 비난하며 시위를 벌였다. 전날 카나 폭격으로 어린이 30명을 포함해 56명이 숨졌다. [베이루트 AFP=연합뉴스]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카나 마을 공습으로 어린이 30여 명을 포함한 민간인 최소 56명이 목숨을 잃은 직후인 지난달 30일 오전(현지시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던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세 차례나 통화했다.

두 번째 전화통화가 끝난 뒤 라이스 장관은 급히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진상 조사를 위해 48시간 동안 공습을 중단키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 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카나 참사는 매우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워싱턴의 백악관도 레바논 국민에게 조의를 표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더 이상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주길 당부한다"는 성명을 냈다.

백악관이 신속하게 이스라엘에 유감의 뜻을 나타냈지만 부시 행정부에 대한 국내외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즉각적인 휴전에 반대하며 이스라엘의 공격을 지지하는 바람에 이런 참사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31일 "이번 사건으로 미 외교는 큰 타격을 받았다"며 "남부 레바논에서 살육이 계속되면서 이스라엘과 그 후원자인 미국에 대한 아랍.유럽의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대로 가면 미국은 이라크전 이후 최악의 국제적 고립에 직면해 이란 핵 프로그램 봉쇄나 민주주의 확산 같은 외교 핵심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사주간지 타임도 "카나 참사로 미국 외교는 절뚝거리게 됐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즉각적인 휴전을 위해 미국에 강한 압력을 가할 것"이라며 "미국과 이스라엘이 고립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은 정당성을 잃게 됐다"고 지적했다.

필리프 두스트블라지 프랑스 외무장관은 기자들에게 "우리는 처음부터 즉각적인 휴전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미국은 입장을 달리했다"며 "진작 우리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국을 비난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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