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장편소설 <주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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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작 ‘침묵의 집’을 전면 개작, 다시 쓴 소설.『주름』

박범신 장편소설 『주름』이 출간되었다.『주름』은 1999년에 출간되었던「침묵의 집」을 전면 개작, 재출간한 장편소설이다. 박범신 장편「침묵의 집」은 그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작품이었다. 절필 선언이후 첫 장편이었고, 세기말의 불안성과 실존적 위기의 징후를 포착해냈다는 평을 받았던 박범신의 야심작이기도 했다. 그런「침묵의 집」을 7년여 만에 다시 수정하고 퇴고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미 한 작품으로서 지위와 인정을 받은 소설을, 그것도 2600매나 되었던 분량을 1000매 가량 줄여 출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주름』의 ‘작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말이 많았거나 참을성 없이 비명을 질러댄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완간된 책을 받아든 날은 너무 가슴 속 등통이 심해 우황청심환을 씹어 먹고 그것도 모자라 깡소주를 병째 마셨다. 뭐랄까, 앞으로도 오래「침묵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그 작품으로부터 내가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온한 예감이 드는 것이었다.”

소설가로서 한 작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는 불온한 예감. 소설가에게 작품이 던지는 무섭고 예리한 질문이었다. 그는「침묵의 집」이 출간되고 나서 계속 그 불온한 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세기말이 지나 “신세기의 시간은 가파르게 다가와 횡포하게 흘러만” 가고, “맹목적인 분노와 비탄과 자학이 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라든가 또는 “뒷 머리털을 쭈뼛 세우려는 듯이 등 뒤로부터 나를 날카롭게 잡아채는 것, 움찔해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히 거기에 존재함으로서 나의 오십대를 잔인하게 가두고 있는 것이 바로「침묵의 집」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의 무서운 그림자는 소설가 박범신의 뒷덜미를 계속 잡아챘던 것이었다. 마침내 2006년, 그는 버리고자 했던 무서운 질문 앞에 당당히 섰다. 7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를 옭아매고 있는 질문을 풀기위해 소설가 박범신은 다시「침묵의 집」으로 귀환한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침묵의 집」이『주름』으로 재탄생 될 수 있었다.

소멸하는 존재들에 바치는 ‘시간의 주름’에 관한 기록.

장편소설『주름』은 어느 일상적인 50대 중반 남자의 파멸과 생성에 관한 기록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이자 화가인 천예린을 사랑하게 된 주조회사 자금담당 이사인 김진영은 그녀를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만다. 그가 사랑한 천예린은 그보다 연상일 뿐 아니라 매혹적이면서도 사악한 팜므파탈적인 오십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김진영은 “잔인하고 황홀한 탄생의 시작”이라 표현할 만큼 천예린에게 깊이 빠져들고 만다. 그는 천예린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의 삶은 헛것이었다.” 며 자신의 삶에 대해 “황홀한 반란”을 꿈꾸기도 하고 동시에 삶의 정체성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고부터 얼마 후 김진영은 사회적 기득권은 물론 가족마저 팽개치고 회사의 자금을 횡령해 자신을 떠난 천예린을 쫓아 떠난다. 김진영은 천예린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아프리카 대륙을 거쳐 스코틀랜드를 지나 시베리아 바이칼에 이른다. 어렵사리 도착한 시베리아의 바이칼에서 김진영은 “내 생의 마지막에 찾아와서 뒷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친 여인, 그녀와의 광포한 사랑에 나는 매일 죽었고 매일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더 다가 갈수도, 붙잡을 수 없는 기이하면서도 ‘광란’같은 사랑을 나눈다. 그런 그들에게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주름』은 사실, 두 50대 남녀의 별로 아름답지 않은 사랑이야기다. 한 남자의 눈물겨운 순애보도 아니며, 광란적인 사랑의 기록도 아니다. 박범신은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보다 근본적으로 실존의 문제를 다룬 겁니다. 죽음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상반된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 영혼과 시간에 매달린 가파른 실존을 그린 거지요.” 또는
“나는 시간의 주름살이 우리의 실존을 어떻게 감금해 가는지 진술했고, 그것에 속절없이 훼손당하면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반역하다 처형된 한 존재의 역동적인 내면풍경을 가차 없이 기록했다”라며 이 소설을 정의하고 있다. 일탈과 절망의 기록인 아닌, 단순한 사랑의 열망과 냉혹한 죽음의 비정함이 아닌, 사랑과 죽음, 그 두 가지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인간의 실존적 물음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소설. 즉, ‘삶은 과연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되묻는 소설. 이런 면면이 박범신 장편소설『주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싶다. 동시에 박범신의『주름』이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명징한 ‘화두’인 것이다.

■ 지은이 : 박범신
1946년 충남 논산군 연무읍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과정에서 드러난 한국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인기 절정의 작가였던 그는 1993년 돌연 문학과 삶과 존재의 문제에 대한 겸허한 자기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갖기 위해 절필을 선언하고 깊은 침묵에 들어가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1996년 유형과도 같은 오랜 고행의 시간 끝에 작품 활동을 재개한 그는 영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품세계로 문학적 열정을 새로이 펼쳐 보이고 있다. 1981년 장편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신인 부문)을, 2001년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로 제 4회 김동리문학상을 수상, 2003년 만해문학상, 2005년 한무숙문학상 수상했으며,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편소설에는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돌아눕는 혼] [겨울강 하늬바람] [불꽃놀이][밀월] [숲은 잠들지 않는다] [우리들 뜨거운 노래] [불의 나라] [물의 나라] [잠들면 타인] [황야] [수요일은 모차르트를 듣는다] [틀] [개뿔] [킬리만자로의 눈꽃] [침묵의 집] [와등] 등이 있고, 소설집에 [토끼와 잠수함] [덫] [그들은 그렇게 잊었다] [식구]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등이, 연작소설에 [흉기] [흰소가 끄는 수레]등이, 산문집에 [무엇이 죽어 새가 되는가]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적게 소유하는 자가 자유롭다]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등이 있다.

■ 정가 : 13,000원

(조인스닷컴 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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