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연, 블라인드로 뽑은 중국인 박사 최종 ‘불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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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해 말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직 하반기 공채에서 최종면접까지 통과한 중국 국적의 진 모 박사가 결국 최종 불합격 처리됐다. 원자력연구원은 13일 오전 인사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결정했다. 또 향후 연구원 공개채용부터는 응시 서류에 국적을 기재하고, 응시접수 채용 공고문에는 ‘신원조회 단계에서 연구원 보안 적합성 등을 함께 심의해 특이사항 존재 시 임용이 제한될 수 있다’는 내용을 알리도록 채용 매뉴얼을 변경하기로 했다.

KAIST서 석·박사 받은 재중동포 #“보안상 외국 국적자 채용 어렵다” #서류에 국적·학교·추천인 명기 등 #과학기술 블라인드 채용 보완키로

원자력연구원은 앞서 지난달 30일 ‘보안심사 및 직장방위협의회’를 열고 보안성 검토를 통해 ‘진 박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외국 국적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하게 되면 보안과제 참여가 제한되고, 일반과제라 하더라도 정년까지 20~30년간 근무하는 과정에서 보안부문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진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진 박사는 중국 국적을 가진 재중동포로, 중국 다롄(大連)공대에서 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KAIST 대학원에서 재료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원자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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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진 박사는 지난해 하반기 원자력연구원 정규연구직 공채에 응했으며, 최종면접까지 통과했다. 하지만 마지막 서류 확인 과정에서 중국 국적자인 것이 밝혀져 연구원 측이 진 박사에 대한 최종 합격을 미뤄왔다.

원자력연구원은 가급 국가보안 시설이라 1959년 창설 이래 지난 60년간 한 번도 외국 국적자가 정규 연구직으로 채용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2018년부터 시작한 블라인드 채용제가 문제였다. 응시서류에 국적과 출신대학을 적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채용심사위원들이 진 박사가 중국 국적자인지 알 수 없었다. 면접 당시에도 “진 박사의 한국어가 너무나 자연스러워 중국인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게 연구원 측의 전언이다.

한편 25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를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도 출연연 맞춤형 블라인드 채용방안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과기출연연은 앞으로 직원 공개채용 때 ① 이력서 등에 ‘출신학교’를 명기할 수 있고 ② 추천인 및 추천서 제출을 허용하며 ③ 외부위원 선정 제한도 완화하기로 했다.

연구회는 이달 안으로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채용 개선안을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하고, 오는 6월까지 연구기관과 외부전문가 등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 연구회는 또 원자력연구원처럼 국가보안 기준이 높은 연구소의 경우 채용시 국적을 확인해서 판단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수정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중앙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과학기술 분야는 세계 각국이 최고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경합하는 곳”이라며 “우리나라는 현행 블라인드 채용 제도하에서 특정 우수 인재를 영입하거나 추천을 하면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말이 안되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원 이사장은 “사회 구성원의 공정한 기회를 위해 블라인드 채용이 필요하다는 그 정신에는 동의하지만, 최고의 엘리트를 영입해서 국가 경쟁력을 길러야 하는 특수한 분야까지 획일적으로 같은 채용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강조했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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