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의 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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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4일 밤 10시 30분 연행. 2시간 가까이 심문. 자백 불충분. 0시 2O분 심문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심문 계속. 만족한 자백 얻지 못함. 혐의자를 의자에 앉히고 손발과 몸을 나일론 줄로 묶은 다음 1m 길이의 몽둥이로 구타. 혐의사실 시인. 그 후 혐의자는 사망. 사체 검안결과 손과 발목에 깊은 피멍이 보임. 사체방치, 16일 오후 늦게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짐.
이 사건의 주인공은 어느 대학 학생들이었다. 그 주인공의 이름을 수사기관원으로 바꾸어 놓으면 우리는 금방 지난 몇년동안에 보아온 그 전율스러운 권력기관의 고문을 연상하게 된다. 그 일을 바로 학생들이 대학의 캠퍼스에서 반복했다.
이솝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다. 원수사이인 두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한 사람은 배의 앞에 타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배의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때 배의 뒤쪽에 앉은 사람이 앞자리의 사람에게 물었다. 『배가 가라앉을 때는 어느 쪽부터 기우는가』 앞에 있던 사람은 『그야 물론 앞쪽이지』라고 대답했다. 뒤에 앉은 사람은 긴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 그렇다면 이제 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내 원수가 먼저 죽을 테니….』
사람들은 원수에 대한 증오가 지나치면 그 화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깜박 잊기 쉽다.
원수도 아닌 사이에 다만 증오심 하나 때문에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를 우리는 일상 중에 너무 자주 보고 있다. 그런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것을 오늘 대학생들은 무슨 논리와 명분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학생들은 지난 시절 민주화를 외치면서 얼마나 권력기관의 고문에 치를 떨었는가. 그 악몽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그러나 오늘 몇몇 대학생들은 어쩌면 경찰이나 했음직한 일을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다. 더구나 그것이 적십자 서클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우리의 충격을 더해준다. 우리 사회에서 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모두가 가식과 위선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더 비애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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