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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무시한 인권위 법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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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권위의 야심 찬 프로젝트입니다."

인권위 박찬운 인권정책본부장은 24일 열린 전원위원회에 차별금지법안을 상정하며 이같이 말했다. 법안은 만장일치로 의결됐다. 2003년부터 인권위가 추진해온 차별금지법 제정이 첫발을 뗀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하며 차별을 예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함." 제1조에 나온 법안의 목적은 누구나 인정하는 당연한 진리라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차별을 허용하자'고 할 리는 없다. 그러나 인권위가 야심 차게 준비했다는 차별금지법안이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든 영역'의 차별을 금지하려다 보니 무려 20가지 사유를 명시했다. 다른 나라의 관련 법안은 대개 6~7가지, 가장 많은 호주의 차별금지법이 14개 사유를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했지만 특정 집단에 불리한 결과를 야기하는 간접차별까지 포함시켰다. 법이 포괄하는 대상이 광범위하다 보니 어디까지가 차별인지 경계가 더 모호해졌다. 이 때문에 성과나 능력에 따른 '차이'가 불합리한 '차별'로 판단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효과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인권위에 시정명령권을 부여한 것이 적절한지도 논란거리다. 미국의 고용평등기회위원회나 영국의 성차별위원회 등은 권고나 조정의 권한만 있고, 그 외의 강제력은 법원으로 넘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안에 따르면 인권위는 차별 여부를 판단하고, 시정명령을 내리고 3000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도 부과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지금까지 "행정기관도, 사법기관도 아니다"라며 독립기구임을 자랑스레 밝혀왔던 인권위가 행정.사법기관의 권한을 넘보고 있는 셈이다.

입법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 "인권위가 우리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며 불만이 쌓인 재계에선 앞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모든 차별을 금지한다'는 거대한 이상에 매달려 현실을 간과한 점은 없었는지, 인권위는 이제부터라도 차분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애란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