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기자의뒤적뒤적] 드라마에 빠졌다고 남편이 흉봅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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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굼벵이 주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해생 옮김, 샘터

굳이 읽지 않더라도, 곁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보는 책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상사 밑에서 일할 때'란 책을 회사 자기 책상에 올려 두는 식이지요. 상사에게는 충분한 메시지를 전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 상사는 '맘에 안 든다고 죽일 수는 없잖아요'란 책을 꽂아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 책은 그런 유에 속합니다. 부제가 '엄마와 아내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게 하는…유쾌한 수다'로 주부의 심정을 대변해 줄 수 있으니까요.

엄마는 '시시한' TV 드라마를 즐깁니다. 같이 보던 온 가족이 핀잔을 주지요. "안 지겨워요?" "정말 수준이 그렇게 낮아진 거예요?" 아들딸이 한마디씩 한 것도 모자라 아빠가 "엄만 생각하지 않아. 다만 느낄 뿐이야"라고 쐐기를 박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비난에 '자성'을 한 엄마가 다음주에 그 드라마를 멀리하자 나머지 가족이 그걸 봅니다. 엄마에게 줄거리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나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작가이자 주부인 지은이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머니들은 가정을 돌보고, 기강을 잡고, 돕고 위로하기 때문에 식구들은 어머니에게 종속돼 있다고 느낀답니다. 그런 막강한 인물을 '약간 모자라는 사람' '사랑스러운 바보' 취급하는 것은 다른 식구들에게 기분 좋은 일, 신나는 일이 되기 때문이랍니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아도, 딸을 낳아도 죄의식을 느낀답니다. 아이들을 두고 직장에 나가도 죄의식을 느끼고 남편에게만 돈벌이를 시켜도 죄의식을 느낍니다. 아이들 성적이 떨어져도, 할인점 대신 가까운 수퍼에서 고기를 사도 죄의식을 느낍니다. 20대처럼 팽팽하고 청순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죄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답니다. 지은이는 여성들에게 이런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누군가가 진정한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이처럼 주부들이 일상에서 겪는 부조리와 부당함을 꼬집고 비트는 글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부들 편만 드는 것은 아닙니다. 허위의식을 일깨우는 글도 있습니다.

'예쁜 내 새끼'를 망치는 '쓰레기' 같은 친구 때문에 고민하는 엄마들에 대한 충고가 그렇습니다. 그 '쓰레기'에게도 엄마가 있고, 그 엄마 또한 자기 아이가 사귀는 흉측한 '쓰레기'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네요.

짧지만 날카로운 49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후련할 겁니다. 적어도 아줌마들의 처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을 겁니다. 다른 식구들의 눈에 띄게 해서 속으로만 삭이던 심정을 알리는 행운이 온다면 더 좋고요.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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