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글로벌아이

미 교민에 불똥 튄 북한 미사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미국의 수도 워싱턴 주변에 사는 교포들은 요즘 화가 많이 나 있다. 메릴랜드주 고위 공직자인 도널드 셰이퍼(84) 감사관이 북한 미사일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인 모두를 모욕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이달 5일 한국 학생 등에 대한 외국인 영어교육프로그램(ESOL)을 언급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언제는 우리의 친구라고 하더니 미사일은 왜 우리에게 쏘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비용을 대는 ESOL 때문에 한인들은 좋겠네"라고 비아냥거렸다. 사과를 받기 위해 찾아간 교민 대표들에겐 "코리아 앞에 '노스(North.북)'만 뺐을 뿐인데 왜 이러느냐"며 도리어 호통을 쳤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연이어 겪은 교민들은 올 11월 중간선거에 앞서 열리는 9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그를 떨어뜨리기 위한 운동에 돌입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17일 교민 사회의 이런 움직임을 전하면서 "셰이퍼에 대해 소수민족은 '이제 떠날 때'라고 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교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고, 민주당에서도 셰이퍼를 비판하고 있는 만큼 그는 선거에서 쓴맛을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니다. 셰이퍼의 낙선이 그의 인식까지 바로잡아 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셰이퍼를 잘 아는 한인단체의 간부들은 "메릴랜드 주지사를 두 번 지내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그가 남북한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가 북한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기로 한국에 품고 있던 불만을 표출한 것이며, 그의 발언은 한.미 동맹이 흔들리면서 생긴 미 지도층 일각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미 동맹의 현주소가 미국 교포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상황에까지 왔다는 걸 셰이퍼의 망언은 보여 주고 있다.

정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정부 말대로 '수평적 동맹관계'를 지향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간 뭘 했는지도 한번 되돌아 봐야 한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고,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가 나온 만큼 성찰하기에도 알맞은 시점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발행된 월스트리트저널 7월 6일자 사설엔 "한국에서의 문제는 대북 정책 변화를 위해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점"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미국 내 보수층을 대변하는 신문다운 말이지만 그래도 그냥 무시하기엔 찜찜하다. 한국 정부와 미국 집권 보수층의 거리를 보여 준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대목을 놓고 정부 측 인사들은 또 흥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감정의 발산보다 이성의 작동이다.

양국 관계가 왜 이렇게 됐는가. 미국을 탓하기 전에 정부가 반성할 건 없는가. 수평 동맹이라는 게 말로만 되는 게 아닌데도 너무 말만 앞세우지 않았는가. '동북아 균형자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북한 미사일 사태 앞에서 우리가 동북아 균형자 노릇을 한 게 과연 있는가. 대미 정책을 비롯한 외교 전반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외교사 연구의 권위자인 김용구(한림대 한림과학원장) 교수의 표현대로 정부가 '오지(奧地) 사고'의 좁은 틀 속에 갇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동북아 균형자니 수평 동맹이니 하는 그럴듯한 용어들이 혹시'오지 사고'의 바탕인 변방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자문해 보라는 얘기다.

더불어 '말은 적게 할수록 바로잡기 쉽다(Least said, Soonest mended)'는 영국 금언을 새겨두면 어떨까.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 인사들은 그동안 실체가 뒤따르지 않는 말들을 너무 많이 했다. 앞으로 말문은 좀 닫고 귀를 더 열면 다른 세상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