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 포기' 트럼프 시한 넘었는데…입장 못 정했다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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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과 면담했다. [워싱턴=이광조 JTBC 촬영기자]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과 면담했다. [워싱턴=이광조 JTBC 촬영기자]

지난 7월 2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중국·멕시코 등을 향해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한국 등이 결정할 수 있는 시한을 90일로 못 박았다. 여기 따른 시한은 오는 23일이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 워싱턴 방문 #백악관·USTR 만나 한국 입장 전달 #"농업 민감성 고려할 필요" #미 "부자나라 개도국 혜택은 부당… #USTR 판단 따라 일방적 박탈할 것" #전문가 "일방적 박탈은 불가"

시한을 하루 앞둔 22일(현지시간)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유 본부장은 면담을 마친 뒤 한국 특파원들과 만나 "미국이 제기하고 있는 개발도상국(개도국) 문제와 관련해 우리나라 농업의 민감성이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농업과 수산업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면서 낮은 관세와 보조금 허용 등 특혜를 받고 있다. 개도국 지위 포기는 이 분야에 타격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면서 농민 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WTO 개혁 차원에서 개도국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지난 7월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한 내용을 지속해서 제기했다고 유 본부장은 전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들어 WTO 개혁 문제를 중요 과제로 설정했다. 회원국 가운데 경제발전 단계가 상당히 높은 국가들이 개도국 혜택을 누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이를 관리하지 못하는 WTO를 개혁해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해왔다.

유 본부장은 개도국 지위 포기 여부에 대한 정부 입장은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국의 국제적·경제적 위치, 대내외 동향,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서 국내 이해관계자와 충분히 소통한다는 원칙에 따라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는 게 정부 입장"이라고 말했다.

검토 후 대외경제장관회의를 거쳐서 정부 입장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정한 기한을 넘기게 된 데 대해 유 본부장은 한국 정부의 자체 판단과 시기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한 연장을 요청했느냐'는 질문에 유 본부장은 "미국 측 상황이 아니라 우리 경제 위상, 경제에 미치는 영향, 국내외 동향을 고려해 검토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한 연장과 시한 등과 관계없이 우리가 자체적으로 필요한 시기와 필요한 상황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각서에서 이 기한을 넘길 경우 USTR의 자체 판단에 따라 개도국 지위를 일방적으로 박탈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미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의 이누 마낙 연구원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미국이 WTO에서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개도국 지위를 일방적으로 박탈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면서 "각서 조항은 법적 효력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 등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은 있다. 유 본부장은 "기한 이후 트럼프 행정부에서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상당하다"면서 "미국 측이 어떤 조치를 하거나 언제 무엇을 할지 예단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월 26일 트위터를 통해 "부자 나라들이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면서 특혜를 얻는 현재의 WTO 체제는 고장 났다. 더는 안 된다"면서 "미국의 희생 위에 부정행위를 하는 국가들이 특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USTR에 내렸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날 서명한 'WTO 내 개도국 지위 개혁에 관한 각서'에서 USTR이 향후 90일 이내에 WTO 개도국 지위 문제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마낙 연구원은 "선진국과 개도국을 나누는 기준이 구시대적 이분법에 머물렀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은 앞선 행정부들도 마찬가지였다"면서 "트럼프 이후에도 지속해서 제기될 문제"라고 말했다.

각서는 OECD 가입국이면서 주요 20개국(G20) 회원, 세계은행이 분류한 고소득 국가이면서 세계 상품무역에서 0.5% 이상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WTO 개도국에 포함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이들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트럼프가 지목한 국가 가운데 싱가포르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했다. 브라질은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했다가 추후 결정하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중국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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