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43. 함춘회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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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동창회관인 함춘회관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서울대 의대 동창회 회장단. 왼쪽부터 심영보,필자,박양실 부회장,박희백 회관건축추진위원장.

나는 서울의대 동창회장에 오른 뒤 번듯한 동창회관을 신축하겠다고 공표했다. 회원의 단합을 이끌어내고,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회관 터는 내가 회장을 맡기 전부터 모교가 제공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새 건물을 짓겠다고 나서자 서울대 총장실에서 난색을 표시했다. 회관 운영이 제대로 안 될 경우 대학본부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나는 "동창회가 운영을 못 하면 이길여 개인이라도 책임지고 관리하겠다"고 문서로 약속했다. 결국 "회관을 20년간 동창회에서 활용하고, 학교에 기부채납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부 교수가 "가뜩이나 캠퍼스가 좁은데…"라며 반대하고 나서 또 한 번 어려움을 겪었다. 그 분들과 싸우고, 설득하기를 거듭해 결국은 건립키로했다.

1996년부터 모금에 들어갔다. 최소한 건평 1000평 이상은 돼야 했기에 30억 원은 모아야 했다. 언론에서도 국내 단과대학 동창회로는 최초로 회관을 짓는다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다들 고개를 갸웃둥한 게 사실이었다.

의사 모임에 참석했더니 한 의사가 나에게 "30억 원을 걷는다면서요? 아마 3억 원도 어려울 겁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의사들은 단합이 잘 안 되는데, 게다가 서울대 출신들이니 오죽하겠느냐"는 표정이었다.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회장단 회의를 소집해 효과적인 기금모금 방법을 논의했다. 내가 앞장서서 3억 원을 내겠다고 기부약정을 한 뒤, 회장단은 의무적으로 2000만 원 이상을 내자고 했다. 그리고 회원 1인당 100만 원을 목표액으로 정했다.

각 지회를 찾아다니며 회원들을 독려했다. "모교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는 만큼, 모교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부산지회 총회, 미국의 미주동창회에도 의대 학장과 회장단이 함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미주동창회에는 1인당 1000달러씩 내달라고 호소했다.

모금에는 나름의 노하우도 필요했다. 회원들에게 매일 독려 전화를 거는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고용했고, 기금은 부담없이 분할해서 자동이체로 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러자 회원들의 참여가 불붙기 시작했고, 미주동창회에서도 2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이 모아졌다. 기금액은 놀랍게도 당초 목표액을 훨씬 웃도는 40억 원이 넘었다.

2002년 10월 지상 7층, 지하 1층 규모로 동창회관이 완공됐다. 회관은 사무국에서 쓰고, 남은 공간을 빌려줘 매년 2억원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회관 관리비는 물론 동창회 사업을 펴는데 큰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이다.

회관을 짓느라 동분서주하며 회장 임기를 네 번이나 떠맡았다. 2003년 정기총회 때 나는 "숙원이던 회관도 건립됐고, 또 내가 관여하는 재단과 대학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므로 회장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나를,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로 재추대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2005년에야 동창회장직을 현 하권익 회장에게 넘길 수 있었다. 재임 10년 동안 열성적으로 도와준 임원진과 선후배 동문들에게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 바로잡습니다

7월 21일자 28면에 소개된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의 '함춘회관'편 사진 설명 중 왼쪽에서 둘째가 필자, 셋째가 박양실 전 서울대 의대 동창회 부회장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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