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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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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도적질, 그것도 신(神)의 물건을 훔치고서야 뒤끝이 좋을 리 없다. 서양에선 프로메테우스가, 동양에선 곤()이 신벌(神罰)을 받았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용서받지 못했다.

곤은 우(禹)임금의 아비요, 삼황오제 중 하나인 전욱의 아들이다. 요(堯)임금의 명을 받아 9년 치수(治水)에 나섰지만 실패해 우산(羽山)에 유배돼 죽었다. '산해경'은 곤이 인간을 위해 상제(上帝)의 보물을 훔쳤다고 적고 있다. 곤이 훔친 보물은 한 덩어리의 흙인 식양(息壤). 그냥 흙이 아니라 끝없이 불어나는 흙이다. 금세 산을 이루고 절벽을 만들어낸다. 곤은 이것으로 둑을 쌓고 물을 막았다. 잠시 성공했지만, 상제가 노해 보물을 거두어가자 세상은 다시 대홍수에 시달리게 됐다.

우는 죽은 아비 곤의 배를 가르고 3년 만에 태어났다. 순(舜) 임금의 명을 받아 결혼한 지 나흘 만에 치수에 나섰다. 13년간 대문 앞을 몇 차례 지나면서도 집에 한번 들르지 못했다. 우는 곤과 달랐다. 쇠 신발이 닳도록 산에 오르고, 자(尺) 하나를 들고 구주팔황(九州八荒)을 모두 측량했다. 하천의 길을 개척해 물을 이끌어냈다. 억지로 막지 않고, 길을 열고 뚫어줬다. 마침내 천하의 물길이 잡혔다. 그 공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우는 하(夏) 왕조를 열었다.

홍수는 두 얼굴을 가졌다. 고대 이집트에선 축복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선 재앙이었다. 이집트는 홍수가 들면 세금을 올렸다. 홍수 때를 잘 예측해 농사를 짓다 보니 나일 강이 범람하면 대풍이 들었기 때문이다. 되레 7년간 나일 강이 범람하지 않았던 제셀왕 시절엔 굶어 죽은 이가 부지기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노아의 방주 등 다양한 홍수 설화가 나올 만큼 홍수가 잦았다. 건기와 우기의 수량 차이가 10배나 됐다. 홍수 예측이 어려웠고 농사 시기도 못 맞췄다. 큰물이 들면 대풍은커녕 작물이 썩기 일쑤였다.

또 홍수가 들었다. 2002년 태풍 '루사'로 184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조원이 넘는 재산피해가 났다. 2003년엔 태풍 '매미'가 그에 못지않은 충격을 줬다. 놀란 정부가 8년간 약 43조원을 쏟아붓는 수해방지대책을 마련했지만, 용두사미 신세다. 홍수가 지나가자 분배 정책, 행정도시 건설 등에 우선 순위가 밀렸기 때문이다.

곤은 하늘의 보물을 훔쳐서라도 물길을 잡고자 했다.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미뤄놓고 언제까지 하늘 탓만 할 것인가.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