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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민족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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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학자 고미숙은 최근 한국사회의 축구 열기와 명성황후 재조명 바람을 '민족주의'라는 키워드로 푼다. 축구 열기는 "축구로 표상되는 애국주의에의 열광"이며 명성황후가 '외세에 맞선 순교자'로 재조명되는 것은 "반일=지선(至善)의 강박증"이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 등 민족 영웅들이 줄줄이 호출되는 것도 "고대사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팽창주의"라고 해석한다.

그의 책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 최강의 이데올로기다. '민족'이란 단어는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처음 건너왔다. 조선왕조 붕괴와 식민시대, 근대국가 건설, 분단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압도적 가치가 됐다. 좌우, 진보.보수가 따로 없었다. "주체사상으로 정점에 달하는 북한의 민족지상주의는 물론이고 온갖 정파가 난립한 80년대 좌파들이 끝까지 견지했던 것도 민족이라는 주술이었다."

한국 사회에만 창궐한 것도 아니다. "첨단 사이버 시대 대부분의 국가를 움직이는 유일한 이념은 민족주의이다. 부침을 거듭한 다른 이념과 달리 민족주의는 이념들의 지존의 위치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이것이 끔찍한 이유는 이 중력장 아래서는 출구가 없다는 점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명제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 위력이 있지만 철학적으로는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이 없다. 대다수 다른 주의(ism)들과 달리 대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E J 홉스봅의 견해도 유사하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세계적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민족과 민족주의는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낮은 위치에 그 역할도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최근 국내 지식사회에서는 국제사회가 폐기한 민족 이념에의 철 지난 집착과 한민족의 우월성만을 내세우는 민족사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탈근대로 진입한 서구와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충분히 유효하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어느 경우든 공통점은 과잉의 민족주의가 냉정한 현실인식을 방해하며 자민족 우월주의,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다. 또 세계시민사회로 가는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이다.

때마침 대중문화계에 민족주의 바람이 거세다. 반일 정서로 무장한 가상 정치영화 '한반도'가 포문을 열었다. TV에서는 '주몽' '연개소문' 등 민족 사극이 한창이다. 이들이 과연 열린 민족주의로의 도약을 보여 줄지, 아니면 협소한 민족 감정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칠지 궁금하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