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학 주춧돌이 역사속으로...|고 이병도박사 영전에 부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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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오늘 아침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학제 민현구교수로부터 듣고 새삼 막막하고 슬픈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역사학계를 이끌던 큰별이 마침내 졌구나 하는 상실감에 저는 잠시 할말을 잊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망백을 넘기도록 수를 누리셨고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신지가 오래였던만큼 선생님께서 조만간 세상을 뜨시리라는 것을 예측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막상 부음을 접하고나니 제자된 도리로 생전에 왜 좀더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가 가슴을 에는 뉘우침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과 제가 처음 만난것은 46년 2월, 제가 서울대학교사학과에 편입시험을 쳐 들어갔을때이니 생각하면 그 인연의 세월이 장장 4O여성상을 넘습니다.
동경에서 서양 사학을 공부하다 한국사쪽으로 학문의 진로를 바꾼 제가 선생님을 처음뵙고 느낀인상은 『아랫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온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학문적으로는 일호의 착오도 용납치않는 대쪽같이 엄격한 원칙의 소유자』라는 것 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스스로가『대강 넘어가는』식의 학문 자세를 죽기보다 혐오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이를 엄하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나깨나 역사의 궁구에만 매달려 계시면서 학문밖의 것은 눈한번 주지않는 타고난 선비로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일본인들의 손안에 쥐어져 있던 한국사를 손수 빼앗아와 이것을 우리의 얼, 우리의 눈으로 가꾸어낸 국사학계의 태두셨습니다. 요즘와서는 선생님의 학문방법인 실증사학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역시 시대상황도 고려하여 자료를 발굴·정리하고 거기서 꼼꼼하게 역사적 진리를 찾아낸 선생님의 그 방법이야말로 당시로서는 최선의 것이었으며 오늘의 한국사학이 있게한 주춧돌이 되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못할 것입니다.
연초 김철준형의 장례식때도 아드님의 부축을 받고 나오셔서『제자를 먼저 보내니 면목이 없다』시며 울먹이시던 선생님.
그러면서도 『1백살까지는 힘들겠지만 내학문이 아직도 미진하니 몇 년은 더 살고싶다』고 생을 향한 강한 의욕을 보이시던 선생님. 그 선생님의 천진하기까지하던 노안이 아직도 제눈 앞에 선합니다. 어이 눈을 감으셨습니까. 못난 제자, 외람되이 몸까지 쾌하지 못해 뗘나신 선생님의 그림자 자락만을 부여안고 울면서 총총 몇자 올립니다. 한우근(학술원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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