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월드컵 TV중계 반성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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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달 9일부터 시작됐던 독일 월드컵이 결국 이탈리아의 우승으로 한 달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지구촌 축제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이 시점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으니, 바로 독일 월드컵 64개 경기 가운데 개막전에서부터 결승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똑같은 경기를 KBS.MBC.SBS 지상파 방송 3사가 동시에 중계방송을 감행한 것이다.

이번 월드컵 개최국인 독일은 물론 축구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영국, 준우승을 차지한 프랑스, 심지어 이웃 일본마저도 지상파 방송사끼리 사전 협상을 통해 중계방송 계획을 사전에 철저하게 분담했다. 이에 따라 지상파 채널끼리 같은 경기를 동시에 중계하는 일 없이 한 채널에서만 중계방송이 이뤄졌다. 개최국인 독일의 경우 최대 관심사였던 독일과 코스타리카의 개막전마저도 공영방송인 ZDF에서만 중계했고 다음 경기부터 민영방송인 RTL과 순차적으로 중계방송을 맡았다. 영국도 공영방송인 BBC와 민영방송인 ITV가 번갈아 가며 중계했다. 한국 못지않게 월드컵 열기가 뜨거웠던 일본에선 공영방송 NHK와 민영방송들이 주요 경기의 중계를 먼저 양분한 뒤 민방끼리 순번을 정해 한 채널씩 중계방송에 임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상파 3사끼리 월드컵중계 협상을 벌였지만 서로가 한국전 등 주요 경기는 반드시 중계해야겠다는 아집에다 광고수입의 극대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찌감치 협상을 결렬시킨 채 '제멋대로 중계'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월드컵 한 달 동안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같은 경기를 지상파 3개 채널에서 동시에 생중계하는 세계 방송사상 유례없는 꼴불견을 연출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먼저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한동안 채널 선택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국 대표팀이 출전한 세 차례의 예선전이 있는 날이면 지상파 3사가 동시 생중계 방송은 물론이고 하루에 14~20시간씩 월드컵 관련 방송으로 도배질을 하다 보니 다른 프로그램은 아예 볼 수 없었다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기본 프로그램을 각계각층 시청자들에게 골고루 방송해야 하는 사회적 규범을 망각한 것이며, 이를 통제해야 할 방송위원회나 이사회 같은 사회적 규제기구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상파 3사의 입장에서도 25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중계권료를 분담한 데다 어떤 방송사에서는 중계차까지 현지로 보내면서 서로가 이중 삼중의 제작비를 감당해야 했다. 여기다 중계방송 시청률 과열경쟁으로 막대한 자체 홍보비는 물론 축구 해설자 스카우트 비용으로 수억원을 쓰는 등 소모적.낭비적 지출을 하다 보니 "별로 재미도 보지 못한 채 전파 낭비라는 욕만 먹었다"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스포츠 육성 발전 면에서도 인기종목이나 관심 끄는 경기에만 중계방송이 집중되는 '스포츠 중계의 편중현상과 상업화 경향'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부채질하고 있다. 비인기 종목은 물론이고 같은 축구경기라도 국가대표팀이 아닌 경기는 중계방송에서 외면당하다 보니, 한국 축구의 산실인 K-리그마저도 텅 빈 관중석으로 축구 열기를 무색하게 한다.

독일 월드컵 폐막 시점에서 하루속히 지상파방송 관련 책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번 동시 중계와 과잉 방송에 따른 심각한 부작용을 냉철하게 반성하고 자사(自社)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끈질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선진 방송답게 시청자들을 위한 국제스포츠 중계일정을 반드시 마련해야만 한다. 그래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지상파 방송들이 금메달 유망종목에만 열을 올리고 육상 등 비인기종목이나 장애인 올림픽 경기는 아예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김인규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