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왕치산 겨냥했나···중국 "美 투항파 때려잡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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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무역전쟁과 관련해 현 중국 정부의 강경 정책을 비난하는 중국 내 목소리가 작지 않은 모양새다. 중국 관영 언론이 “투항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며 “이들을 마치 큰길 건너는 쥐처럼 때려잡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펴기에 이른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내 미국과의 강경 투쟁을 주도하는 주전파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중국에서 투항론을 경계하는 글이 나온 지난 7일 시 주석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중국 신화망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 내 미국과의 강경 투쟁을 주도하는 주전파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중국에서 투항론을 경계하는 글이 나온 지난 7일 시 주석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모습. [중국 신화망 캡처]

지난 7일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가 운영하는 신화망(新華网)에 왕핑(王平)이란 필자 명의의 칼럼이 실렸다. 우선 제목이 거칠었다. “투항론자는 ‘큰길 건너는 쥐(過街老鼠)가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길 건너는 쥐’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때려잡으라고 소리친다. 즉 뭇 사람에 의해 손가락질과 배척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왕핑은 “곱사병에 걸려 민족의 기개를 잃은 일부 사람이 ‘중국이 열세에 처했으니 타협해야 한다’는 투항론으로 민심을 교란한다”고 질타했다.

중국 관영 언론에 ‘투항파 때려잡자’는 이례적 칼럼 등장 #“미국 좋은 점과 중국 나쁜 점 비교해 ‘중국 끝났다’ 주장” #홍콩에선 “중국 최고 지도부 내 투항파 있나” 분석도 나와

왕핑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투항론자는 “미국의 중국 괴롭히기와 강권 정치 행위를 무조건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라 옹호하며 무역전쟁의 책임을 중국에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등 미국에 빌붙는 아첨을 떨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투항론자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미국의 가장 좋은 면과 중국의 가장 나쁜 면을 ‘과학적으로 대비시킨’ 뒤 그 결과를 갖고 ‘끝났다. 이제 중국은 끝났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관영 신화망에 실린 왕핑의 칼럼은 미국과의 무역전쟁과 관련해 중국의 투항론을 질타한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중국 관영 신화망에 실린 왕핑의 칼럼은 미국과의 무역전쟁과 관련해 중국의 투항론을 질타한 것으로 주목 받고 있다. [중국 신화망 캡처]

칼럼은 이처럼 미국에 아첨하며 미국의 중국 때리기를 돕는 투항론자의 앞에는 만 길의 깊은 못이 있을 뿐임을 경고한다고 말했다. 또 중국인들은 마땅히 이 같은 투항론자의 참모습과 음험한 속내를 간파해 이들이 더는 준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핑은 끝으로 1938년 항일전쟁 시기 나온 투쟁을 격려하는 시 “우리가 싸우러 나가지 않으면 적이 총검으로 우리를 찔러 죽인 뒤 우리의 뼈를 향해 ‘봐라, 이게 바로 노예’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라며 미국과의 결연한 투쟁을 강조했다.

중국 관영 언론이 공개적으로 중국 내 투항론자가 있다며 이들을 향해 과격한 경고문을 띄운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현 정부의 대미 강경책에 대해 반대를 넘어 비난하는 목소리가 중국 내 존재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중국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총편집 후시진(胡錫進)도왕핑의 칼럼이 나온 이튿날인 8일 “양보론이나 투항론으로 중국의 대미 태도를 주도하려는 건 황당무계한 것”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해 중국 내 의견 대립이 작지 않다는 점을 시사했다.
후시진은 “미국과 관계가 좋은 나라 즉 한국과 싱가포르는 잘 살고, 미국과 사이가 나쁜 나라 즉 이란과 북한, 베네수엘라는 다 못산다”는 말은 근거가 없다며 “이런 논리로 중국의 대미 태도를 주도하려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시진은 “일부 사람들이 미국의 맹렬한 기세에 눌려 마치 오줌이라도 지린 듯” 양보론과 투항론을 편다며 “중국이 미국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면 중국 역사에서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콩의 정치 평론가 쑨자예(孫嘉業)는 10일 “중국 관영 매체가 마침내 그 창끝을 내부로 돌리기 시작했다”며 “그 창끝이 겨누는 건 인터넷상의 유명 블로거 정도가 아니라 더 큰 목표, 아마도 중국 지도부 내 투항파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쑨자예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주전파(主戰派)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고 지적하면서 무역전쟁과 관련해 “이제까지 나온 중국 지도부 인사의 말을 볼 때 리커창(李克强) 총리나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이 주화파(主和派)에 가까운 것 아니냐”는 견해를 제시했다.
현재 중국은 인터넷 사정이 매우 나쁜 상태다. 6월 초엔 지난 4일로 30주년을 맞은 19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라는 민감한 시기를 맞아 중국 당국이 엄격한 조처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정작 6.4 천안문 사태 30주년이 지난 최근 상황이 더 나빠졌다. 한국 ‘네이버’ 등이 접속이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통제 시스템으로 일관하는 중국이 5G 시대를 선도해 나가겠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불만이 베이징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배경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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