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서울 사는 친구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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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 사는 친구에게’- 안도현(1961∼ )

세상 속으로 뜨거운 가을이 오고 있네

나뭇잎들 붉어지며 떨어뜨려야 할 이파리들 떨어뜨리는 걸 보니

자연은 늘 혁명도 잘하는가 싶네

풍문으로 요즈음 희망이 자네 편이 아니라는 소식 자주 접하네

되는 일도 되지 않는 일도 없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싶거든, 이리로 한번 내려오게

기왕이면 호남선 통일호 열차를 타고 찐계란 몇 개

소금 찍어 먹으면서 주간지라도 뒤적거리며 오게

금주의 운세에다 마음을 기대보는 것도 괜찮겠고.

광주까지 가는 이를 만나거든 망월동 가는 길을 물어봐도 좋겠지

밤 깊어 도착했으면 하네, 이리역 광장에서 맥주부터 한 잔 하고

나는 자네가 취하도록 술을 사고 싶네

삶보다 앞서가는 논리도 같이 데리고 오게

꿈으로는 말고 현실로 와서 걸판지게 한잔 먹세

어깨를 잠시 꽃게처럼 내리고, 순대국이 끓는

중앙시장 정순집으로 기어들 수도 있고, 레테라는 집도 좋지

밤 12시 넘으면 포장마차 로진으로 가 꼼장어를 굽지

해직교사가 무슨 돈으로 술타령이냐 묻고 싶겠지만

없으면 외상이라도 하지, 외상술 먹을 곳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날이 새면 우리 김제 만경 들녘 보러 가세

지평선이 이마를 치는 곳이라네, 자네는 알고 있겠지

들판이야말로 완성된 민주대연합 아니던가

갑자기 자네는 부담스러워질지 모르겠네, 이름이야 까짓것

개똥이면 어떻고 쇠똥이면 어떻겠는가

가을이 가기 전에 꼭 오기만 하게



시인이 전교조 활동을 하다 해직되었을 때 쓴 시다. 빈털터리 해직 교사가, 어깨가 축 늘어진 서울 친구를 초청하는 것이다. 희망은 등 돌릴 때가 많지만 친구는 언제나 친구다. 희망보다 친구가 많아야 한다. 친구가 희망이다. 아니, 희망보다 더 클 때가 있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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