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특권·서열의식부터 뿌리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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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9 선언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급속한 민주화 바람은 그 길목에서 엄청난 열병을 앓고 있다. 지나치게 높은 소수의 목소리, 연중 행사화 된 폭력을 수반한 시위와 파업, 혹백단순 논리의 횡행, 다수의 침묵 등 진정한 민주화에 역행하는 형태들이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다.
공권력의 퇴색과 더불어 마땅히 인정되고 존중되며 보호받아야 할 권위는 위축되어 생색이 없고 청산되어야 할 권위주의적 작태는 일상생활 속에서 비일비재하다. 윤리 덕목과 공중도덕이 파괴된 현실 속에서 오늘을 사는 국민 대다수는 심한 불안감을 안고 나라가 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권위주의 팽배>
오늘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의 하나로 권위의 부재와 권위주의의 횡행을 들 수 있다. 권위는 되살아나야 하고 권위주의적 작태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한다.「막스·베버」의 권위 유형에 따르면 민주사회가 인정해야하는 권위는 법적·합리적 권위이지 신분적·생득적인 전통적 권위도 아니고 지도자의 비범성과 초능력을 인정, 정당화하는 카리스마적 권위도 아니다.
합법적 권위는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명백한 규칙과 절차에 의해 합법화되고 사회적 합의로 성문화된 법률에 근거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적 권위는 어느 특정 개인이 생득적으로 지니는 특성이 아니고 그가 맡고 있는 직책에서 나오는 것이며 규정된 법규 내에서의 권력 행사만이 용인되는 것이다. 권위는 분명히 폭력이나 강압과는 구분되어야 하며 분명한 위계질서 속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작금의 우리 사회 현실은 있어야할 권위의 실추로 말미암아 기본질서의 와해와 더불어 주객과 선후가 뒤바뀌고 불법과 폭력이 질서를 앞지르는 난조를 보이고 있다.
합법적인 권위가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권위와 함께 싸잡혀 도매금으로 지탄의 목표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느 체제보다 국민의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선택이 요구되는 제도다. 우리 모두 냉철한 판단과 단호한 결단으로 있어야할 권위를 되살려내야 한다.
합리적인 권위의 지켜야 할 법주와 한계가 무너질 때, 또는 주어진 권위를 집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이를 유지·향유하려는 이기심이 작동할 때, 또는 권위를 전통적인 것, 아니면 카리스마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행사할 때 권위주의적 발상과 행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권위주의적 특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정치체제로 전제 정치, 나치와 같은 지도자 독재정치, 전체주의 체제 등을 들고 있다. 정치이념으로서의 권위주의는 분명히 독재적 특성을 지니고있는 동시에 반 민주주의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
권위주의적 특성 속에서 우리는 권력행사의 독점성과 자의성, 정치권력의 적법성 무시, 국민자유에 대한 과다한 제한, 정책 결정의 일방성 내지 강요성, 사회 통제를 위한 전제적 수단의 이용 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정치심성은 정치구조를 비롯한 모든 구조에 있어 분명한 위계질서와 사회성원의 계층화(계급화)를 강조하고, 민주적 정치과정을 기피하며, 사회문제의 해결 및 질서유지를 위한 강력한 사회 통제력의 행사원으로서「위대한 지도자」의 등장을 기대하고, 인종 중심 내지 지방 중심주의적 감정이 강하고, 위법·일탈에 대한 감정적·도덕적 반증으로 가혹한 처벌주의를 강조하는 성향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심성의 사회적 표현이「내가 누구인데」하는 특권의식, 지나친 서열의식, 또는 관존 민비의 형태로 나타나며 널리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이러한 권위 의식이 권력자만이 갖는 비뚤어진 인성이냐, 아니면 우리 나라 국민 모두가 어려서부터 가꾸어 오고 사회화·일반화 된 보편적인 심성이냐 하는 점이다.

<일반화된 심성>
선거 때 당선되기 위해 온갖 아부와 비굴을 주저하지 않다가 당선되고 나면 권위주의적 자세로 돌변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의 사회적 성격에는 겉 다르고(수단적인 민주)속 다른(목적적인 권위주의)것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컨대 서열 내지 위계는 조직성원 활동에 있어서의 지위 및 역할과 관련해 제기되는 문제이지 일과 무관한 개인관계까지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직원 야유회에서 부장 부인이 평사원 부인의 위에서는 풍경은 어쩌면 이러한 권위주의적 심성을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데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도 반성해보는 마음을 가져야하겠다. 대통령이 방귀를 하니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며 어느 수행 고관이 진복했다는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지위의 고저, 관민, 남녀를 막론하고 권위주의적 의식은 민주적 의식과는 분명히 이질적인 것이며 물과 기름처럼 서로 용해 안 되는 상호 배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겠다. 내가 너에게 군림하고 네가 내게 맹종하는 관계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질 수 없다.
아직도 널리 우리생활의 문화적 기반이 되고 있는 유교적인 생활 습성과 관념 속에는 장유유서·여필삼종· 관존민비 등의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 테두리 내에서의 가부장적 권위의식이 아무런 저항 없이 담을 넘어 민주화하려는 국가·사회의 영역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권재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해 어느 특정한 개인의 힘이 아니고 피지배자의 동의에 입각해 통치자를 바꿀 수 있는 시민통치의 정치체제며, 통치권력과 권위를 정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에게 한시적으로 위임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권재민 원칙>
민주주의 사회는 어쨌든 국민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다. 따라서 침묵의 다수는 위기 때마다 의사표시 할 경로를 가져야하고 폭력을 수반하는 고성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국민의 선택을 묻는 제도권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6·29 이후의 민주화 시대에 청산되어야 할 권위주의적 작태가 민주화로의 변화와 그 의미에 가장 민감해야할 대민 봉사의 위치에 있는 공박계층에서 오히려 일반 시민보다 둔감하고 구태의연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며 새남 특권의식이 너무도 뿌리 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민주주의란 나의 주장과 함께 남의 주장도 존중되어야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규칙에 따라 서로 경쟁해 타협과 양보로 조화를 찾아가는 경쟁 사회이지 나만의 이념과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규칙 없는 투쟁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아니다.
누구는 누구 위에 군림하고, 누구는 누구 밑에 맹종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관념에서 깨끗이 벗어나 민주화는 우리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는 의식을 분명히 가다듬고 이에 걸맞은 심성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이 나라를 민주화시키고 우리 모두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는 첫 길이 묄 것이다. <윤기종 교수·서울여대 사회과학 대학장·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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