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총재 소환』대응에 강경론|당국 속셈 몰라 "눈치 보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이 마무리 되는 단계에서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와 문동환 전 부총재에게 출석 요구서가 계속 발부되어 파문이 쉽게 가라 않을 것 같지 않다.
평민당이 확대 간부회의·의원 간담회 등을 잇달아 열어 불응 방침을 재확인하며 「평민당에 대한 음해 공작」이라고 정치공세를 가열화하고 있으나 안기부 역시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2차 소환장을 발부하는 등 법적 절차를 밟고있다.
평민당은 김 총재 등에 대한 소환장 발부가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한 형식적 절차의 성격이 짙으며 구인 사태까지로 발전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나 안기부의 진짜 속셈을 아직 몰라신중한 대응을 하고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이번 사건을 평민당 지도부까지 확대시키지 않은 채 문익환 목사 사건 때 유원호씨를 만났던 김영삼 민주당 총재에게 적용했던 방식으로 김 총재에게도 소환장만 발부해 놓고 꼬리를 남기는 식으로 넘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같은 전망은 평민당의 희망 사항이기도 하고 다수설이기는 하나 적지 않은 정계 관측통들은 안기부가 쉽게 손을 떼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다.
○…평민당은 김대중 총재와 문동환 의원에 대한 안기부의 출석 요구서 발부가 진상의 규명이란 측면보다는 평민당의 대국민 이미지 실추에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며 정치 공세로 대응할 태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안 당국이 사건을 확대시키기보다는 끝내기단계에서 요식 절차상 출석요구서를 보낸 것으로 보고 그렇다면 지나치게 강경 반응하는 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지 모른다는 신중론도 만만찮다.
그 때문인지 당공식 성명은 강경하게 나오면서도 동교동이나 여의도 당사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다소 불안해하며 냉소적인 반응만을 보이고 있다.
13일 안기부 조사를 마치고 곧 바로 당사 기자실에 들른 김원기 전 총무는 김 총재에 대한 출석 요구서 발부 소식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우리가 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짓』이라고만 촌평.
평민당은 김 총재가 출석을 거부해도 구인장까지는 발부하지 않으리라 믿고있지만 어찌됐든 공안당국이 김 총재에 대해 조사를 요구함으로써 이 사건으로 평민당 지도부의 발목을 잡아 당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알 맞는 대응을 하기로 결정.
이에 따라 이상수 대변인은 출석 요구서 접수 직후 강력한 논평을 발표했고 14일에는 의총 성격의 의원 간담회를 열어 정부측을 규탄.
김 총재는 13일 저녁 동교동 자택에서 이재근 사무총장·김봉호 정책위 의장·김원기 전 총무·이 대변인·조승형·이철용 의원 등과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회의가 끝난 뒤 이대변인은 성명을 발표, 『공안 당국이 출석 요구서를 발부한 이유는 수사상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고 평민당에 대한 신임을 실추시키고 특히 영등포 선거에 악용하기 위한 짓』이라 해석하고 『우리는 노 정권의 음모를 알기 때문에 출두요구에 응할 수 없으며 야비한 조작수사와 야당탄압에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고 역설.
평민당은 ▲정부가 정치척 긴장을 조성하면서까지 굳이 김 총재에 대한 조사를 강행치 않을 것이고▲오히려 출석 요구서 발부 수준에서 사건을 어정쩡하게 매듭지어 놓는 것이 정부로서도 여러모로 이득이 된다는 짐작과 문익환 목사와 평양을 동행한 유원호씨를 사전에 만났던 김영삼 민주당 총재도 출석 요구에 불응한 전례 등을 들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판세를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평민당은 현재 여권과 막후 채널이 단절된 상태여서 『사건을 이 정도에서 끝내자』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 받지 못해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평민당측의 이 같은 희망적 분석·전망과는 달리 안기부는 나름대로 신중히 대처할 수 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기부는 당초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적법 절차 준수▲정치적 의도 배제▲성역 없는 수사를 원칙으로 조사에 임했다. 이 같은 원칙을 정하기 앞서 안기부는 내심 적지 않은 고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리하고 적극걱인 수사를 하면 당장 진상 파악 진도에는 덕을 볼 수 있지만 그로인해 고문수사·인권 문제 등이 대두되면 야당의 역습을 받을 수 있고 국민여론으로부터도 불리한 위치에 설지 모르기 때문.
이번에 서 의원의 배후와 전모를 한꺼번에 뿌리 뽑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안기부가 탈법 수사를 않았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공권력의 신뢰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안기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서 의원이 3시간마다 한마디씩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는 지구전을 폈으며 이철용 의원 소환 등에 「힘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안기부 관계자들은 오랜 경험과 「육감」으로 평민당 지도부 및 재야에 상당한 사전인지 혐의를 두고있으며 그것은 서 의원 사건과 별개로 계속 추적하겠다는 전략이다.
김대중 총재에게 한사코 진술을 받으려는 것은 김 총재가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이 단계에서 「증거」를 확보해야 나중에 다른 사실이 드러나면 진위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평민당과 장기전을 할 각오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평민당은 안기부가 김대중 총재에 대해 조사하려는 서경원 의원의 공천 경위에 대해 전적으로 김 총재와 무관함을 강조.
김원기 전 총무는 13일 안기부의 조사를 받으면서 『서 의원은 가농 회장이라는 직책 때 문에 공천 신청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서 의원이 일반인과 달리 예의 범절 등 기존틀을 벗어난 점들이 있었다』고 진술.
특히 김 총재 유럽 순방에 수행시킨 이유는 교황 방문이 주요 일정이어서 선거에 도움이되도록 가톨릭 신자 중심으로 수행원을 선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
또 수사당국에 막후 창구 노릇을 하고 있는 권노갑 의원도 이날 오후 김기도 안기부 정보자문 위원과 마포 가든 호텔에서 접촉, 당 지도부 조사에 대한 당의 입장을 전달.
권 의원은 『김 총재는 서 의원 공천 당시 총재직에서 물러나 박영숙 부총재가 총재 권한 대행이었고 공식적 공천기구에는 기존 당료인 김영배 (위원장)·최영근·허경만 의원, 안동선 전 의원 외에 재야측의 이길재씨와 임채정·이해요 의원이 참여했으므로 오히려 그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주장. <이연홍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