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30. 의료취약지 양평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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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8년 길병원 산부인과 박지홍 과장(左)(작고)과 양평길병원을 둘러보고 있는 필자.

양평길병원을 개원하자 당시 큰 병원을 운영하던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선생, 판단 잘못했어. 그 병원은 영원히 적자를 면치 못할 거야"라며 걱정했다. 나는 "적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무료병원 운영하는 셈 치고 맡았어요"라며 웃어넘겼다.

선배들의 걱정은 일리가 있었다. 한강 상류 지역인 양평은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발전할 수 없는 곳이었다. 개발을 못 하는 농촌지역에서 인구 증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적자'는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양평길병원 인수에 대해 한 기자가 "적자를 메울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말하자 "앞으로 취약지에서 또 병원을 운영하겠느냐"고 묻는다.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능력이 되는 한 계속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돈보다 중요한 보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평길병원은 해마다 1억5000만원 정도의 경영적자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인천길병원의 성장으로 양평의 적자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개원한 바로 다음날의 일이다. 한 농부가 고단한 삶을 이기지 못해 양잿물과 소주를 마시고 남한강에 투신했다. 사경을 헤메던 환자는 응급조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들 가까이에 양평길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에도 종종 심각한 농약중독과 교통사고 등으로 생명을 위협받았던 환자들이 목숨을 건졌다. 이런 것이 적자를 감수하고 양평길병원을 맡은 보람이었다.

적자보다 더 큰 문제는 의사 파견이었다. 초빙한 의사들은 얼마 있지 않고 도시에서 근무하겠다며 사직하기 일쑤였다. 도리 없이 난 인천길병원 의료진을 양평길병원에 순환근무토록 했다. "우리 병원은 '박애.봉사.애국'을 원훈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입니다"라고 나는 강조했다.

진료과장들은 6개월 단위로 의무적으로 다녀오게 했고, 인턴과 레지던트는 한두 달씩 양평에서 근무하게 했다. 벽지수당을 줘 보수도 올려줬다.

양평길병원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의료진의 반응은 한마디로 "좋은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대하면서 의료취약지인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곤 다른 의사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해 주며, 양평 근무를 권하기도 했다.

의사 파견뿐 아니라 적자 병원을 이끌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원장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던 중 인천길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정형외과 전문의가 된 오세중 과장을 눈여겨봤다. 그는 양평 출신이기도 했다. 1985년 오세중 원장이 취임했다.

오 원장은 취임 즉시 인천길병원과 연계된 기혼여성 자궁암.유방암 무료검진을 군내 12개 읍.면에서 실시했다. 고령자, 무의탁 노인과 영세민에게 무료진료도 해줬다.

양평군에서 선정한 효부.효자상 수상자와 그의 부모, 군(郡) 대표 운동선수단 등 '고장을 빛낸 사람'에게도 파격적인 진료 혜택을 주면서 '양평 주민의 병원'으로 자리매김해 갔다. 양평길병원은 의료 사각지대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고, 의사의 소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곳이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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