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당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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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승 분위기에 묻혀 주목받지 못한 채 넘어간 게 있다. 민노당의 성적표다. 민노당은 선거 직후엔 "민심을 읽지 못했다" "환골탈태해야 한다"며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건만 아무 움직임이 없다.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지나가기로 작정한 듯하다. 민노당은 몇 차례 회의 끝에 선거 결과를 '답보'라고 평가했다.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패배하지 않은 선거라고? 국민은 민노당에 옐로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민노당은 이를 외면하는 형국이다.

민노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정당득표율 12.1%를 기록했지만 기초단체장 당선자는 한 명도 내지 못했다. 상승세가 꺾였고 기초단체장 제로 시대를 맞았다. 그런데 정당득표율이 17대 총선의 13%와 비슷하니 '답보'라는 것인가. 진보 지식인들은 '진보 진영에 대한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진단하는데도 말이다.

박상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패배 책임론이 나오지 않는 것은 민노당 내부의 정파 간 알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NL(민족해방)계와 PD(민중민주주의)계의 오랜 갈등 속에서 선거책임론은 당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는 NL계의 퇴진을 의미한다. 이를 수용할 수 없기에 선거 결과를 '답보'라고 우기는 것은 아닌가.

민노당의 위기는 정체성을 착각한 데서 비롯됐다. 국민이 민노당에 표를 주고,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이 원내 진입한 데 대해 함께 기뻐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기성정치권에 실망한 나머지 민노당이 새 정치의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했다. 한국에도 자생적 사회주의 정당이 나타날 때가 됐으며, 민노당이 서구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민노당은 이 희망과 기대를 저버렸다.

2004년 총선 이후 민노당은 정치공학에 탐닉했다. 원내 과반수를 잃어버린 열린우리당의 약점을 공략해 정치적 이익을 추구했다. 그 결과 민노당은 '여당 2중대'로 인식됐고, 여당 지지율과 동반 상승.하락하는 '지지율 동조화 현상'을 맞았다. 그러니 여당에서 이탈한 표가 민노당으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서민은 하루하루 살기도 힘든데 '반미''자주'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민노당 내에서 북한 비판과 친미 발언은 금기다. 북한 체제는 물론 북한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것조차 보기 어렵다. 이번 지방선거 중에 북측이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라"고 해도, 심지어 "민노당을 찍으면 사표(死票)가 되니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고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신 미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다.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의 공동위원장을 경기지사 후보로 공천하기까지 했다. '미제 강점 60년'이란 주장도 국민에겐 설득력이 없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외세가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 갔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국내외 자본의 충실한 대리자다" "민노당은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국가기구의 법과 제도를 폐지할 것이다." 2000년에 만든 민노당 강령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민노당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민주노총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만족할 것인가,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당이 될 것인가. 프랑스 사회당과 영국 노동당, 일본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은 급진적 사회주의 정강정책을 온건하게 다듬어 가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19세기, 20세기식 급진 좌파정당으로는 미래가 없다. 당내 정파의 기득권 지키기에 빠져 있으면서 정치개혁을 말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집권하겠다는 건 이율배반이다. 역사와 국가와 인간에게 진지하지 못한 민노당은 존재가치가 없다.

2002년 대선에서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라는 말로 국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제 그 말을 민노당에 되돌려 줄 때가 됐다. "민노당 여러분, 지금 그대로 행복하십니까."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