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길병원 개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필자.
82년 어느 날 대학 후배인 이성우 보사부 의정국장이 만나자고 했다.
"양평병원이 도산 후 2년 동안 방치되고 있다"며 "양평군은 재정자립도가 18%로 경기도 최하위권이니, 적자도 불 보듯 뻔한데 누가 맡겠느냐"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배님은 고향에다 무료병원 짓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앞으로 전(全) 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오는 만큼 무료병원 설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행정적인 지원을 다 할 테니,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셈 치고 양평병원을 맡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현지에 가보기로 했다. 당시 인구 6만명의 양평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은 번듯한 건물에 식당도 즐비하지만, 당시엔 말 그대로 전형적인 산골이었다.
공사가 중단된 양평병원 내부는 거미줄이 가득했고, 철근이 삐져나와 있었다. 곳곳에 부실공사 흔적이 남아있는 흉물 그 자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수는 어려울 것 같았다. 안되겠다 싶어 병원을 나서려는데 할머니 대여섯 분이 나를 막아섰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내 치맛자락을 잡으며 "선생님, 우리 할아범이 중병에 걸려 누워 있는데, 큰 병원에서 큰 주사 한 번만 맞고 죽는 게 소원이랍니다"라며 애원하는 것이다. 종합병원에서 영양제라도 한 번 맞아봤으면 한다는 뜻이리라.
언뜻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농촌에서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어 치료 한 번 못 받아 보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할머니의 간절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제가 병원을 맡아서 할아버지하고, 아프신 모든 분들을 치료해 드릴게요"라고 약속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 언덕을 내려오는데 당시 양평경찰서 수사과장이었던 이정식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천에서 근무할 때 우리 병원에서 아이 셋을 낳은 분이다.
그분이 나를 추어탕 집으로 안내하더니 "우리나라에선 이 병원을 맡을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제가 선생님 병원에서 아이를 얻으면서, 선생님이 환자에게 쏟는 애정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인천에서 무료진료로 환자를 돌봐주셨듯이 양평 주민들을 돌봐주십시오"라며 양평병원 인수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내 결심을 알려주자 그는 뛸듯이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82년 6월 16일 양평군 공흥리에 80병상 규모의 양평길병원이 탄생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