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회가 정부 侍女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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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우방궈(吳邦國)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초청을 받고 중국을 공식 방문하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미국.일본에 이어 세번째 당사국 방문이다. 지난 25일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북한 핵문제와 6자 회담 등에 대해 대화했다.

갈 때마다 천지개벽을 거듭하는 것처럼 변하고 있는 중국의 활기와 저력에 감탄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서울로부터 급보를 받았다.'감사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이다.

보고를 받으면서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국가의 운명이 결정적인 고비를 맞고 있는 가운데 이웃 나라는 정부와 국민이 함께 뭉쳐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내편, 네편을 갈라 싸워야 할지 생각하면서 우울했다.

이른바 '신4당 체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대통령이 국회를 존중하면서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물론 대화로 풀 수 없을 정도의 견해차가 있는 사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안은 그리 많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결과적으로 이견을 좁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대화를 하면 그 만큼 나아질 것이다.

나는 당선자 시절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회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한 바 있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했다. 고영구 국정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국회는 高원장 임명을 부적절하다고 판단했던 적이 있다.

그때 盧대통령은 국회의 판단을 외면한 채 高원장 임명을 강행했다. 헌법상 국정원장 임명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임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盧대통령은 高원장을 임명하기 전에 국회에 대해 정중하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국회 지도자들을 만나 "국회의 의사는 잘 알겠다. 하지만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니 쓰지 않을 수 없다. 양해해 달라"고 했다면 기류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사사건건 대립하고 불신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회와의 대화는 여소야대 상황에서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방편 같은 것이 아니다.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의사에 따라 국정을 운영해야 하고 국민의 의사는 국회에 의해 대표된다. 따라서 대통령이 국정현안에 대해 국회와 상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안건을 국회에 휙 던지고 설득을 위한 진지한 노력은 하지 않다가, 부결되면 뒷다리 잡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국정을 운영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국회가 정부의 시녀 취급을 받던 때는 그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국회도 그 때의 국회가 아니며, 무엇보다 국민이 더 이상 그 때의 국민이 아니다. 유독 청와대만 아직도 그 시절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 같다.

미국 대통령이 가장 많은 노력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대 국회 설득작업이다. 주요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국회 지도자를 만나고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설득하고 있다. 청와대가 말로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하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 의문이다. 이번에도 감사원장 임명의 취지와 방향을 국회를 상대로 충분히 설명했는지 잘 모르겠다.

여당은 과연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일을 원내에서 대변하려고 노력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수당도 다수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다수당일수록, 또 힘이 있을수록 절제하고 인내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화와 타협이 안될 때 다수결로 가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국회 운영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盧대통령에게 당적을 떠나 국회 전체를 상대하도록 권유하고 싶다. 정치적 목적이나 복선없이 진심으로 국가를 생각하며 협조를 구한다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권력만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책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수반되는 역할에 충실할 때 대통령의 권한도 제대로 행사될 수 있다. 다시 서울에서 온 보고에 따르면 盧대통령이 조기 탈당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쪼록 이번 일을 계기로 국회와 청와대가 제대로 된 관계를 복원했으면 한다.

박관용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