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졸한 정치양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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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소야대의 4당 체제에서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하자면 4당이 대화와 타협을 하는 길뿐이고, 대화와 타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4당간에 최소한의 신뢰 바탕이 있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더 나아가 4당이 서로 헐뜯는 관계라면 이런 4당 체제에서 정상적인 국정 운영은 난망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의 4당 관계를 보면 지난 1년여의 시험기간을 거치고서도 여전히 필요한 최소한의 신뢰 기반도 구축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걸핏하면 서로 의심하고, 사소한 일을 두고 비방·매도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며 문제의 사안에 대한 확실한 사실규명을 기다리거나 규명해 보려는 노력도 없이 비방과 매도부터 하고 보는 풍조가 만연돼 있다.
최근에 있은 노·김영삼 회담 후 정가에 나돈 밀약설만 해도 그렇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밀약설」 때문에 의심과 불신의 골짜기만 더 깊게 하는 현상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런 현상은 지난 3월 노-김대중씨의 회담 후에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그 때 역시 밀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 후의 정치전개를 보면 밀약의 진부는 어느 사이 사라지고 4당간 불신만 높인 결과 외에 남긴 것이 없었다.
이처럼 여야 영수간의 단독회담이 있기만 하면 반드시 나도는 묵계·밀약설의 정치 풍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다시 노-김대중, 노-김종필씨 간의 영수회담이 열릴텐데 기다렸다는 듯이 회담이 끝날 때마다 밀약설이 나온다면 영수회담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이번 4당간의 개별 영수회담은 1년 이상 끌고 온 5공 청산과 광주 문제, 각종 입법문제 등에 대한 일괄 타결을 기대하는 중대한 회담이요, 4당 체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정치력을 과연 갖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마지막 시험대이기도 하다. 이런 중요한 영수회담을 시작에서부터 밀약설로 황폐화시키는 정치풍토는 4당이 함께 반성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수간의 회담에서 무슨 「약속」은 있을 수 있다. 피차 더 생각해 보기로 약속할 수도 있고, 서로 도울 것을 약속할 수도 있다. 그것이 대화의 정치에서 기대되는 바다. 그러한 원칙적인 약속은 시시콜콜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밀약」이라고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갑-을간의 논의가 병의 목소리와 다르다고 해서 그 논의에 의혹의 검은 보자기를 씌워 매도할 수는 없다. 「밀약」이라는 표현이 공개되지 않은 약속의 뜻이라면 모르되 일반적으로는 비도덕성을 띤 흥정으로 인식된다.
지금의 4당 체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고 있다. 입법의 어려움, 정책 집행의 어려움을 포함해 국정운영 전반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길은 선거를 통해 국민이 부여한 길이다. 그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 피해 의식을 갖는다면 어려움은 어려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4당 체제 자체의 파국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이런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양당 체제에서와는 다른 각별한 각성이 정치인들에게 있어야 한다. 정당·정치집단의 상반된 이해를 어른스럽게 조정·처리해야한다는 각성이다. 밀약설 등으로 보게되는 정계의 불신 풍토가 조장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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