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산업 국영화하고 측근들이 경영권 장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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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 나라 산업계 핵심 인사들이 집결했다. 이 도시를 방문한 푸틴을 맞기 위해서다. 내로라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회장들이 줄지어 서서 푸틴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마치 지휘관에게 사열을 받는 군인들 같았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19일자에서 이 광경을 전하며 "푸틴이 '주식회사 러시아'의 CEO로 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푸틴이 소련이 무너진 뒤 민간에 넘어갔던 전략 산업을 국영기업에 다시 넘기게 해 이들의 덩치를 불린 데 이어, 최근에는 국영기업은 물론 주요 민영 기업의 경영자도 상당수 측근으로 채워넣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의 대학 동창을 포함,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관료 출신들이 주요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이런 상황을 '크렘린식 국가자본주의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유가 급등과 자원 위기를 바탕으로 세계 5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러시아 제1의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대표적이다. 가스프롬의 CEO 알렉세이 밀러는 푸틴이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을 할 때 함께 일했던 인물이다. 이 회사 회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역시 크렘린 비서실장 출신으로 현재 부총리를 겸하고 있다. 겉모양만 기업이지 실제로는 국가 조직의 일부인 셈이다.

FT에 따르면 행정부 소속 관료 11명이 러시아 주요 기업 6개의 회장직과 12개 국영기업의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다. 또 15명의 장관이 6개 기업 회장직을 맡고 있고, 24개 이사회에 참여 중이다.

심복들을 CEO와 이사회 멤버, 회장에 포진시킨 푸틴은 인수합병도 정부의 입맛대로 진행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러시아의 의도는 핵심 전략산업의 덩치를 키워 국가 부흥을 선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말 믿을 만한 측근들에게 맡겨야만 옐친 시대와 같은 부정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논리도 펴고 있다. 하지만 FT는 "정부 관료들의 산업계 장악이 오히려 시장원리의 작동을 막고, 옐친 시대 못지않은 로비와 부패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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