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묘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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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영(1934~ ) '묘비명'(부분)

나도 이제 내
묘비명을 쓸 때가 돌아온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자네는
아니 벌써? 하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다정하고 잔인했던 친구여,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었고
눈 덮인 길에는 핏자국이 찍혀 있다

어쩌면 나는 오랫동안
이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살았는지 모른다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올곧게 살아가는 선배 시인의 쉰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비슷한 세월을 살아온 때문일까. 가슴에 날것 그대로 아프게 새겨져 온다. '다정하고 잔인했던 친구'는 아마도 살아온 세월의 그림자이니라.

마종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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