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채무회피 목적 명의신탁 부동산 소유권 돌려받지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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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갚지 않거나 탈세를 위해 부동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옮겨 놓았을 경우 원래 주인은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는 부동산의 실제 주인이 명의를 빌려준 사람(명의수탁자)을 상대로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와 배치된다.

서울서부지법 민사2단독 이종광 판사는 경매 등을 피하고자 서울에 있는 2층 주택의 소유권을 외삼촌(64)에게 넘겨준 박모(54)씨가 외삼촌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판사는 "부동산실명제는 경제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기.탈세.탈법 행위 등 사회적 부조리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며 "따라서 불법행위를 한 원소유주가 나중에 부동산이나 부동산 매매대금 등을 돌려받는 것을 원칙적으로 봉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조세포탈 등 불법을 목적으로 명의신탁을 한 경우엔 민법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민법 제746조는 불법행위의 경우 부당이득의 반환을 요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며 "박씨는 강제집행을 피할 목적으로 재산을 은닉했다"고 지적했다. 2205억원의 추징금이 선고됐지만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주장해 재산을 은닉했다는 의혹을 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둘째, 편법적 명의신탁은 사법정의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판사는 "재산을 다른 사람 명의로 해둬 정당한 채권자가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기존 대법원 판례가 부동산실명제 정착을 방해한 면이 없는지 살펴볼 때"라고 강조했다.

◆ 대법원 판례 바뀌나=명의신탁은 일제시대에 종중 소유의 토지를 등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돼 80여 년간 유지됐다. 1995년 7월 시행된 부동산실권리자 명의등기에 관한 법률(부동산실명제)에 따르면 명의신탁은 무효다. 그러나 대법원은 그동안 "명의신탁 자체가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며 명의신탁 제도를 인정해 줬다.

예컨대 원래 소유자가 명의수탁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 경우 원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거나, 명의수탁자가 부동산 매매대금을 반환토록 했다. 민법상 계약자유 원칙을 고려할 때 부동산실명제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는 취지다. 헌법재판소가 2001년 "명의신탁이 불법이라고 실권리자의 권리가 원천적으로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판결이 항소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거나 유사 판결이 이어질 경우 어떤 형태로든 명의신탁을 둘러싼 재산권 분쟁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이 다시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진 변호사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변경해 명의신탁을 인정하지 않으면 부동산시장의 명의신탁 관행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명의신탁이 친족 간이나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사이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 만큼 관행이 쉽게 바뀌기는 힘들 것이란 반론도 있다.

하재식 기자

◆ 이종광(38)판사=지난해 11월 "친일재산은 '3.1운동의 정신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에 위반되는 행위로 취득된 재산"이라고 판결, 친일파 후손의 땅 찾기 소송에 제동을 걸었다. 천안 중앙고와 연세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97년 부산지법에서 판사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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