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준의 의학노트] 아쉬워 말아요, 그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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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호 35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누구나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안타까워할 때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명백했던 것을 보지 못하고 틀린 판단을 했기에 아쉬워하는 것이다. 심지어 과거로 돌아가 당시의 선택을 바꾸어보는 상황이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는 과거의 선택에 대해 자주 후회하고 낙담한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65세 된 남자가 집 근처 병원에서 종합 검진을 받았다. 검진 항목에는 당연히 흉부 X선 촬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판독 결과는 정상이었다. 문제는 3년 후에 생긴다. 기침이 멎질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흉부 X선 사진에서 큰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악성 흉선종으로 진단받은 그는 수술,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불행히도 16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폐암으로 진단된 환자의 5년 전 흉부 X 선 사진에서 이상을 찾기 어렵지만 (왼쪽 사진), 진단 당시의 사진에서 종양을 확인하고 나면 (가운데 사진), 5년 전 사진에서 어렵지 않게 종양의 시초를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사진). ⓒ 서울대학교병원

폐암으로 진단된 환자의 5년 전 흉부 X 선 사진에서 이상을 찾기 어렵지만 (왼쪽 사진), 진단 당시의 사진에서 종양을 확인하고 나면 (가운데 사진), 5년 전 사진에서 어렵지 않게 종양의 시초를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사진). ⓒ 서울대학교병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환자의 가족은 3년 전의 흉부 X선 사진이 정상이라고 판독했던 영상의학과 의사를 상대로 거액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환자의 가족을 대리한 변호사는, 3년 전에 촬영한 흉부 X선 사진에서 작은 종양이 뚜렷이 관찰된다는 다른 영상의학과 의사들의 감정서를 판사에게 제시하며 영상의학과 의사가 명백한 오진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의사와 그가 선임한 변호사는 과연 어떻게 이를 반박하려 했을까?

의사 측 변호사가 들고나온 논리는 바로 ‘사후 설명 편향’이다. 이는 사람들이 결과를 알고 나면 그에 맞추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다. 즉, 환자 가족 측 변호사는 감정을 의뢰했던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에게 처음에 촬영했던 X선 사진만 보여주고 의견을 물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시간이 지나 종양이 명백하게 보이는 X선 사진을 함께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의사들이 처음 촬영했던 사진에서 초기 단계의 작은 종양이 보인다고 판독했다는 것이다. 종양이 확실하게 보이는 두 번째 X선 사진을 함께 제공하여 정답을 알려주니 전문의들이 ‘사후 설명 편향’에 빠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의학노트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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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에 참여한 배심원들은 뜨거운 토론 끝에 결국 ‘사후 설명 편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사 과실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고도로 훈련된 전문의들도 ‘사후 설명 편향’에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은 미국 애리조나 의과대학의 윌리엄 얼리 교수팀에 의해 여실히 증명되었다.

급성 뇌경색이 의심되는 환자들이 응급실을 찾으면 우선 뇌 CT 촬영을 시행하여 정보를 얻고, 이후 환자의 상태가 안정되면 더 정확한 검사인 MRI 검사를 통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는다. 얼리 교수팀은 우선 뇌경색으로 최종 진단된 환자들과, 뇌경색이 의심되었지만 결국 아니라고 판명된 환자들의 뇌 CT를 여섯 명의 영상의학과 전문의에게 보여주어 뇌경색 여부를 진단하게 했다. 열흘이 지난 후 이들에게 같은 CT를 다시 판독하게 했는데, 이번에는 같은 환자들의 뇌 MRI를 제공해 이를 참고하게 했다. 정답을 알려준 후 뇌 CT를 다시 판독하게 한 셈이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정답을 모른 채 진행한 첫 번째 CT 판독에서 뇌경색의 기미를 찾지 못했던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은 MRI를 확인하여 정답을 알고 난 후 CT를 다시 검토하자 뇌경색의 증거를 훨씬 정확하게 찾아냈다. 정답을 알고 나니 ‘사후 설명 편향’에 때문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답은 분명한데 고비마다 지혜롭지 못한 선택을 했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그렇지만 그건 ‘사후 설명 편향’일 뿐이다. 시간이 흘러 결과를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우리가 했던 선택들이 그때는 최선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틀렸지만 그때는 그게 맞았다.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훌훌 털어버리고 씩씩하게 새해를 맞자.

임재준 서울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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