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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화가 복원된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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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사전에 호는 "본명이나 자(字) 이외에 쓰이는 아명"이라고 풀이돼 있다. 그러니까 본명이나 자.호는 모두 사람을 부르기 위해 짓는 이름의 일종이다. 그중에서도 호는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혹시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옛날에는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었다. 이름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해 임금과 스승.부모(君師父)만이 부를 수 있었다. 본명을 못 부르는 대신 편하게 부르기 위해 지은 것이 '자'였다. 자는 관례를 올리면서 짓는다 해서 '관명(冠名)'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것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풍조가 생기고, 그래서 생긴 것이 '호'다. 그러니까 호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이름인 셈이다.

중국에서 호는 당나라 때부터 등장한다. 시인 이백은 태백(太白)이라는 자 말고도 청련(靑蓮)이라는 호도 있다. 우리의 경우 고려 초기의 학자 최충이 성재(惺齋)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삼국사기'의 김부식도 뇌천(雷川)이라는 호를 썼다. 그 이전의 최치원이나 최승우 같은 사람들은 중국에 유학을 했으면서도 호가 없다. 이로 미뤄볼 때 우리의 경우 호는 고려 초기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무신란 이후 새로 중앙 관계에 등장한 사람들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됐다.

호는 주위에서 붙여주기도 하고 스스로 짓기도 한다. 희구하는 삶의 태도나 지향하는 가치를 나타내는 글자를 넣어 짓는 경우가 많다. 말을 너무 잘하지 않으려 한다 하여 '눌재(訥齋)'라고 호를 하기도 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극재(克齋)'나 '복재(復齋)' 같은 호도 있다. 그런가 하면 숨어 살고자 한다 하여, 고려 말 목은.포은.도은처럼 '은(隱)'자를 넣은 호도 많다. 지명을 따서 호를 삼은 경우도 제법 많다.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면서 연암이라는 호를 썼고, 허균의 호 교산(蛟山)도 강릉에 있는 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황은 그가 머무르는 곳 가까이에 있는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바꾸어 호로 삼았다. 지명에서 따온 것이면서도 벼슬에 나가기보다는 물러나려 했던 그의 삶의 태도가 묻어난다.

조선 말의 장혼(張混)은 자신의 신분적 비애를 함축해 호를 '이이(而已)'라고 지었다. 두 글자 모두 특별한 의미가 없는 어조사로, '이이'를 굳이 해석하자면 '~뿐'쯤 될 것 같다. 중인 신분이었던 그가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를 이 호로 나타낸 것이다. 그에게는 '공공자(空空子)'라는 또 다른 호가 있는데 이것 역시 자신의 궁박한 처지를 나타낸 것이다.

조선 말기의 화가 최북의 호 중엔 '칠칠(七七)'도 있다. 그의 이름 '北'을 파자해 만든 것이지만, 기껏해야 양반들에게 그림이나 팔아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칠칠'맞지 못하다고 자조한 호다.

이처럼 호엔 남다른 의미가 담겨 있고, 서로 호를 부르며 대화하는 모습에선 여유와 운치가 풍겨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선 호가 사라졌다. 언론이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영어 이니셜로 쓰는 게 유행하면서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여겨진다. DJ나 YS처럼 훌륭한 호를 가지고 있는 인사까지 굳이 영문 이니셜을 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질 뿐인데도 왜 그런 유행이 생겨났는지 나로선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호를 짓고 부르는 '호 문화'를 복원시키면 어떨까. 한결 품격 있고 풍요로운 '관계'가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김상조 제주대 한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