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목사카드」최대로 활용할 속셈|북한, 고위당국자회담 왜 연기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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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북고위당국자회담을 위한 제3차 예비회담을 하루 앞두고 북한이 11일 느닷없이 회담연기를 통보해옴으로써 문익환 목사 북한밀항으로 냉각되기 시작한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있다.
관례상 48시간이전에 통보하게 돼있는 회담연기요청을 북한이 회담 하루 전에, 그것도 아무이유도 밝히지 않은채 통보해오고 우리 역시 별 이의 없이 연기를 일단 받아들인 것은 문씨 사건 이후 남북관계를 보는 양측의 시각을 여러모로 짐작케 한다.
실제로 우리측은 지난7일과 8일 국무총리주재로 총리공관에서 관계장관회의를 갖고 회담연기를 깊이 있게 검토한바 있다.
그러나 우리측이 회담을 연기시킬 경우 자칫 남북대화중단의 책임을 뒤집어쓸 우려가 있고 명분상 북한측에 밀리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회담엔 예정대로 나가기로 했었다.
대신 정부는 회담결렬을 각오하고 북한측에 「언어의 총공세」를 펴 『본때를 보여주자』는 회담전략을 세웠었다. 말하자면 내심 『북방정책의 기조는 종전대로 유지하되 남북관계개선은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우리정부의 이같은 전략을 북한이 감지하지 못했을리 없고 따라서 회담연기요청은 북한이 나름대로 선수를 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정부가 지난10일 회담참석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서둘러 연기요청을 하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이 회담연기를 통보하게된 근본적인 배경은 문 목사 카드를 대내외에 최대한활용하기 위한 책략에서 비롯됐음이 물론이다.
북한으로서는 문 목사가 귀국하기 전에 회담을 열어봤자 덕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을 했음직하다. 문씨를 처벌하면 재미없을 것이라는 공갈외에 남쪽에 유효한 공세를 퍼부을 거리가 별로 없고 자칫 그 같은 대남비방이 남쪽의 다수국민들에게 내정간섭이라는 달갑지 않은 여론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이 단계에서는 관망하는 것이 남한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말하자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회담을 열어 설전을 하느니보다 문 목사 구속-전민련·전대협등 재야·학생단체 반발-반대시위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뒤 적절한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속셈이며 그 시기를 오는 26일께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우리내부정세의 불안정에 거는 기대는 실로 대단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국노동단체협의회 (전노협)가 추진하고 있는 5월1일 메이 데이 전국 총파업과 노학연계투쟁은 그들에게 물실호기이며 사태진전양상에 따라 북한은 새로운 전략수립의 전기를 마련하려 들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12일 예비회담이 열려 남북대결로 파탄을 맞으면 남쪽정부에 좌익척결의 명분을 줄뿐이라는 계산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밖에도 오는 15일 김일성 생일을 앞두고 회담에서 우리측이 김일성 부자세습체제와 문 목사 개별초청 등 북의 통일전선전술을 강력히 비방하고 나올 경우 자칫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을 욕보이는 「불경」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회담연기배경의 하나일수도 있다.
또 다른 배경에는 북한이 우리의 올림픽을 맞상대하기 위해 유치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7월)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경색됐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유리하지 않다는 계산을 한 것 같다는 분석도 있다.
평양축전에서 덴마크·스웨덴 등 참가단의 일부가 북한의 인권침해사례를 거론하겠다고 나서고있는 마당에 예비회담에서 우리측이 북한의 인권문제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나오면 북한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북한의 인권상황에 관한 정보는 외국에서는 전무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북한측 사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우리측의 공세는 결코 만만히 넘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북한의 입장에서 중·소와의 관계를 볼 때에도 남북대화창구를 계속 열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조자양 중국 당총서기의 방북 (오는24∼29일)과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서기장의 방중이 임박한 시점에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중소의 대북한개방·화해압력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측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군사회담에 근접할 수 있는 이 회담을 깡그리 포기할 수는 없는 면도 있다.
이같은 북한의 속셈과 문 목사 사건이후 우리내부의 좌경문제를 고려 할 때 우리 역시 굳이 예비회담을 열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마디로 남북관계는 서두를 필요도 없고 서두른다고 우리 의도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인 듯하다.
통일원 당국자는 『우리가 북한의 상품을 사주고 북한의 대 서방접근을 도와주는 위치인 만큼 북한이 남북관계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지금의 양측사정으로 미루어 18일의 남북체육회담 속개도 불투명하며 고위당국자 예비회담도 북한측이 제시한 26일보다 늦춰진 5월 중순께나 재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당국자는 『남북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는 변화가 없지만 북한측이 1, 2차 회담때와 같이 회담을 정치선전에만 이용하려한다면 무턱대고 응해줄 수는 없다』고 밝혀 앞으로 북한의 회담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 우리측 대응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했다.

<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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