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바이칼 호수의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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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리산 품새를 보려면 덕유산이나 백운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큰산도 작은 봉우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법.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여하튼 지리산 조망 일번지는 오산 사성암의 좌선대입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주능선과 구례 들녘이 한눈에 보이고, 산태극.수태극의 섬진강 물굽이가 발아래 용틀임을 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굳이 패러글라이딩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벌써 유유히 창공을 나는 한 마리의 외가리. 눈 시린 쪽빛 하늘을 보다가 눈을 감고 좌선에 들면 아련히 선인(先人)들의 바이칼 호수가 떠오릅니다. 우리의 형제 브리야트족과 몽골인들이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고, 마침내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기적 소리를 울리며 바이칼 호수를 에돌아가고 있습니다.

시베리아의 진주로 불리는 바이칼은 민족 시원의 자궁 같은 곳. 지난해 그곳의 알혼 섬 부르한 바위 앞에 자작나무 솟대 하나를 세웠지요. 녹색 영성순례단의 이름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오늘은 지리산을 바라보며 솟대의 안부를 묻습니다. 한번이라도 바이칼의 차고 맑은 물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세상의 모든 물은 다 바이칼의 물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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