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고궁이 TV 사극 세트장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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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번에 비지정 문화재에서는 야간 궁궐 씬을 찍을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SBS 방송이 다음달 6일부터 방송하는 드라마 '왕의 여자'의 제작을 담당한 운군일 제작본부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궁에서의 야간촬영이라면 지난해말 11월 문화재청이 전면금지한 사항이다.

KBS 사극 '왕과 비' 촬영 당시 국보 제 225호인 창덕궁 인정전 주변에 LPG 통을 들여 놓고 가스불로 횃불신을 찍는 등 문화재 소실 위험성이 제기돼 야간 촬영이 금지됐다. 그렇다면 1년여만에 번복된 까닭은 무엇일까. 문화재청은 야간 촬영을 금지하고 주간 촬영만 허가하며 TV 3사에 세트장을 지으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세트장을 마련하지 못한 방송사들이 유예 기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문화재청은 심의 위원회를 열고 국보.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아닌 비지정 문화재에서는 올 연말까지 야간 촬영을 허용한다는 결론을 냈던 것. 여기에는 초롱 등(燈)을 쓸 때 촛불을 쓰지 말고, 제작진들이 담배를 피지 말라는 여러 조항이 따라 붙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그렇다고 문화재 안전이 담보되는 게 아니다. 고궁을 촬영 세트장으로 이용하겠다는 발상부터 잘못됐다"고 말한다.

문화재청은 이번 조치가 연말까지 한시적이며 그 이후에는 불허 방침을 고수할 것이라 하지만 그나마 믿기 어렵다. 방송사의 세트장을 보면, MBC는 의정부에 임시 세트를 운영 중이고 KBS의 전북 부안 세트장 건설 공사는 잠정 중단된 상태다. SBS는 아직 제대로 된 세트가 없다. 따라서 이런 유예 건은 계속 이어질 공산이 높다. '예외 규정'을 남발하는 것은 관련 규정이 아예 없는 것만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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