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영광」보다「위약비난」선택|중간평가 급선회의 배경과 정국전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이 백척간두에서 중간평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급선회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미 여야양측에 의해 신임연계국민투표를 전제로 찬반 유세전이 시작되고 다수 국민과 정치권의 촉각이 국민투표의 성격과 시기에 쏠려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중간평가를 「무기연기」한다는 선언은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불과 1주일 전 청와대 고위당정회의에서 단순정책평가로 한다는 결론을 스스로 주재해 내린 노 대통령이 갑자기 정반대의 결심을 한 배경과 진의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는 정부·여당 관계자들도 내심 당혹과 한계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노 대통령의 결심이 논리적 모순이나 언행의 불일치 측면에서 다소 문제점이 있는 것을 시인하면서도「더 큰 약속을 수행하기 위한 작은 약속의 포기」, 또는「국가차원의 결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정부·여당은 용어야 어떻든, 대통령의 임기를 건 국민투표를 하면 이길 수야 있지만 그 결과가 분열된 국민을 통합하고 대통령의 정국주도능력을 강화하기보다는 사회를 온통 대결과 혼란으로 몰아가 궁극적으로는 파국을 재촉할 것이 뻔하므로 이를 막아야 한다는 쪽에 노 대통령이 섰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나라와 국민전체에 부담을 주는「상처뿐인 영광」을 지향하는 것보다는「약속위반」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파국을 막는 것이 대통령의 책임이며 최선의 선택이란 논리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번의」근거로 최근 중간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난맥상을 예시했다. 막상 국민투표를 하려고 보니 싸움은 대통령선거를 방불케 하는 여-야간의 사생결단의 양상을 띠고 이틈을 노린 좌경·폭력세력의 정권타도운동은 체제전복을 겨냥하고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봄철 노사분규 및 학원소요와 시기적으로 맞물려 국민투표의 전과정이 불법집단행동과 폭력의 전시장으로 변할 것이 예상되고 그로 인해 경제가 받을 타격, 지역감정의 악화, 민생치안과 사회기강의 해이는 국가안보의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떠내려가는 지경에 대통령이 정략적·정권적 차원의 국정운영을 할 수 없으며 또 그 같은 자세는 야당의 이해와도 부합되고 막후절충을 통해 상당히 공감대가 형성된 것임을 비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결단에 앞서 야당지도자들과「허심탄회하게」의견을 나눈 점을 강조하고 대한변협의「중간평가 위헌 론」을 원용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시사는 야당과의「대 타협」에 의한 결정임을 뒷받침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청와대 당국자는 주말인 18일 김대중 총재가 부천유세에서『5공 청산 및 민주화 후로 중간평가를 연기할 것을 선언하라』고 했고, 같은 날 김영삼 총재가『좌우가 격돌하면 나라의 파탄만 부른다』고 주장한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3야 총재회담에서 합의사항으로 발표됐고 청와대 개별회담에서 확인됐다시피 5공 청산이 되지 않은 중간평가는 반대라는 것이 야당의 기본입장이 아니냐는 것이다.
중간평가를 이 시점에서 국민투표로 실시할 경우 자칫 극우와 극좌의 대결로 양상이 가열되고 그때 3야당은 명분상 재야에 얹혀 반대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 정부가지면 파국이요, 정부가 이기면 3야당총재의 입지는 시련에 부닥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중간평가의 취소를 의미하는 노 대통령의 이번 결단을 보통의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야당의 구체적 대응이 무엇이며, 전민련 등 극렬 재야와 좌경·용공척결의 결정적 계기가 되어 주기를 바랐던 극우세력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따라 그 의미와 파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청와대 당국자들은 야당이 외견상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관계없이 이번 결단은「연기」이며, 그것은 야당의 요구와 일치하고 또한 양해가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찍 불신임투쟁을 선언한 김영삼 총재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을 못하지만 적어도 김대중·김종필 총재와는 깊숙한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 바탕 위에서 나온「대 타협」인 만큼 앞으로의 진전을 주목하라는 얘기다.
야당 가에서 성급하게「밀약 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노 대통령과 김대중·김종필 총재간에는 5공 청산의 방법과 노 대통령이후의 정국구도에 관해서도 상당한 의견교환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노 대통령은 담화에서 지난 시대의 잘못을 청산하는데「여-야의 정치력발휘」를 강조했는데 그쳤지만 내막 적으로 야당 총재들과 구체적 방법에 있어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날지가 주목이다.
여권소식통은『전두환·최규하 전 대통령들의 증언문제가 곧 진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며 야당총재들이 5공 청산의 조건으로 내세운 핵심인사들의 공직사퇴문제가 가시화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노 대통령은 대 국민약속위반 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대신 야당총재들은 적당한 선에서 5공 청산을 양해하는 선에서 현 4당 체제의 정국구도를 지속시키자는 묵계가 성립되고 그것이 대의정치발전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청와대 당국자들의 분석이다.
또 노 대통령은 좌우세력의 일대 접전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치적 다툼을 중단하고 시급한 당면과제를 야당과 협의해 추진할 것을 밝혔다.
이에 따라 지자제 실시 등에서는 야당의 주장이 대폭 반영된 새로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도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연립내각 형태의 여-야 정국공동운영이나 내각제개헌을 위한 새로운 시도 등이 예견되기도 한다.
문제는 노 대통령의 이번 결단이 과연 야당과 심모원려의 공감대가 있는 일대전환의 포석이 될지 아니면 국면 모면을 위한 대증 요법에 그치게 될 지에 따라 앞으로의 정국전개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전 육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