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형식적인 존대는 싫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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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의 두번째 영화 '살인의 추억'이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에 초청돼 스페인에 와 있다. 경쟁부문으로 초청된 영화제에선 늘 기자회견 같은 것을 하게 마련이다. 파란 눈의 서양기자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한다.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사건과 그 당시 한국 사회의 맥락 같은 것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사실 해외에서의 인터뷰나 기자회견은 국내에서보다 두 배의 시간이 소모된다. 질문이건 대답이건 통역자에 의해 한번씩 더 반복되는 셈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소 지루한 회견이 계속되던 중, 문득 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어차피 여기엔 전부 스페인과 유럽기자들뿐이고,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통역자 외엔 아무도 없다는 것. 나는 슬그머니 … 반말을 쓰기 시작한다. "그게 말야, 그 당시 한국 상황이 실제로 그랬거든" "라스트 신은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는 느낌이 중요했어…." 공식석상에서 반말을 사용하니 묘한 스릴과 짜릿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반말 중에도 나의 억양이나 얼굴표정은 진지하기 때문에 외국기자들은 변함없이 심각한 눈빛으로 내 말에 집중한다. 오로지 통역을 해주시는 한국분만 슬며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쓸 뿐.

그런데 묘하게도, 반말을 함으로써 내가 그 외국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묘한 친근감, 나 자신이 솔직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말의 내용에 있어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자세하고 진지하게 설명하려 애쓰고 있는데, 반말이면 어떻고 존댓말이면 어떤가. 게다가 저들은 어차피 우리처럼 세밀하고 강고한 존댓말 구조를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나 또한 이렇게 반말을 쓰는 것이 서로 공평(?)한 것이 아닌가도 싶고.

사실 우리의 경우 술자리 같은 곳에서 보면 (특히 남자들은)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는 몇인지, 학번은 어떤지 등등을 꼬치꼬치 따져보며 서로 말을 놓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때때로 그런 쪽에 집요한 사람들이 "학교에 일찍 가서 학번은 하나 위지만, 생일은 두 달밖에 차이가 안나니까 서로 말을 놓죠"라는 둥, "양력이 아니라 음력 생일로 치면 사실은 내가 한 살 윈데" 라는 둥…. 구차한 수준까지 파고들며 술자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렇듯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서로의 수직적 관계부터 정확히 규정하려 애쓴다. 우리말의 정교하고 강력한 존댓말 시스템이 더더욱 이를 부추긴다. 그런 숨막히는 시스템에 대한 반대급부로 '야자타임', '거꾸로 타임' 같은 다소 유치한 놀이를 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속좁고 성질 더러운 고참의 심기를 건드려 어이없는 구타와 단체기합으로 상황이 종결되기도 한다.

누구나 느끼지만, 사람이 쓰는 말은 사람의 행동과 사고를 규정한다. 우리는 우리말의 특성에 힘입어 사람관계를 어떻게든 상하관계, 수직관계로 몰고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공식석상의 언어가 사적 세계의 언어와 너무나 달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우리말 특유의 섬세한 존댓말 표현들은 언어 그 자체로 무척이나 흥미롭고 아름다운 표현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한편 반말의 시원함과 솔직한 뉘앙스 또한 똑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딱딱한 공식석상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연설자의 반말이 유독 장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진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만우절 하루에는 온갖 거짓말도 애교로 용인되듯이, '반말의 날' 같은 것이 일년에 하루라도 있어서 그날만큼은 공식석상이건 방송에서건 누구나 반말을 써도 된다면 매우 즐겁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안녕. 아홉시 뉴스 엄기영이야. 오늘 임시국회 소식부터 말해줄게…." 상상만 해도 신선하지 않은가?

봉준호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