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의 '극좌 바람'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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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알란 가르시아(56.사진) 전 페루 대통령이 16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4일 치러진 페루 대선 결선 투표의 개표가 80%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중도좌파 계열의 가르시아 후보는 극좌 민족주의자인 오얀타 우말라(43) 후보를 10%포인트 차이로 따돌리며 승세를 굳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가르시아 후보는 35세이던 1985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빼어난 웅변 실력에다 수려한 용모로 한때 '중남미의 존 F 케네디'로 불리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국정 운영 성적은 형편없었다. 그의 집권 후반기에 페루는 연 3000%에 이르는 살인적 인플레에 시달리는 등 경제 정책 실패와 좌파 게릴라들의 무장투쟁으로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결국 가르시아는 90년 대선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패한 뒤 부패 혐의를 받자 긴 망명 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해 온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입국하려다 지난해 11월 칠레에서 체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서 아메리카 인민혁명동맹(APRA)의 후보로 나선 가르시아는 4월 실시된 1차 선거에서 우파 여성 정치인인 루르데스 플로레스를 가까스로 제치고 결선에 진출한 뒤 결선에는 비교적 낙승했다. 그의 역전극에는 유권자들의 '반(反)차베스' 정서가 큰 몫을 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우말라를 적극 지원하고 가르시아를 맹비난하며 공공연히 선거에 개입해 왔다.

차베스의 '분신'으로 불리는 우말라 후보는 당선할 경우 기존 정치 구조를 타파하고, 부유층의 재산을 빈민층에 재분배하는 등 급진적 개혁정책을 펼치겠다고 공약했다. 반면 가르시아 후보는 차베스에게 '큰 지갑을 가진 꼬마 독재자'라고 야유하며 자신이 집권하면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외자 유치에도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1차 선거에서 우파인 플로레스 후보를 지지했던 수도 리마의 중상층 유권자들이 결선에선 가르시아에게 표를 몰아줬다. 그를 '차악(次惡)'이라고 판단한 셈이다. 우말라는 '차베스 역풍'이 예상외로 거세지자 차베스를 향해 "지옥에나 가라"고 몰아붙이며 뒤늦게 '거리 두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한편 최근 콜롬비아 대선에서 우파 후보가 승리한 데 이어 페루에서도 좌파이긴 하지만 '반(反)차베스'성향의 후보가 당선되자'중남미 좌파 열풍'이 한풀 꺾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가르시아는 이날 대선 승리를 선언하며 "남미에서 군부 독재적이고 퇴행적인 모델을 확산시키려는 차베스 대통령의 시도를 유권자들이 막아냈다"고 평가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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