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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페스토, 검증이 더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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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라는 드라마는 후보자 간 혼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접전이 전개될 때 관객인 유권자들은 흥미를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5.31 지방선거는 비록 일부 지역에서 박빙의 접전이 있기는 했으나, 이미 등 돌린 민심으로 대세가 굳어진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이기에 유권자는 흥미를 잃었고, 더구나 집권여당이 선거도 끝나기 전에 정계개편 운운하면서 패배를 자인하는 행태를 보여 흥행에 실패한 드라마였다.

이런 드라마에서 그나마 유권자의 관심을 끈 행위는 매니페스토(참공약) 운동이다. 지연.학연.혈연.금연(金緣) 등 4연(緣)에서 벗어나 정책 경쟁을 통해 선거문화를 바꾸자고 전개한 매니페스토 운동은 유권자는 물론 후보자.언론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선거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특히 3월 16일 5당 대표가 매니페스토 협약식을 거행해 모처럼 매니페스토에 의한 정책선거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서울시장 선거에서 색깔을 동원한 이미지 열풍,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 사건으로 인한 박풍으로 매니페스토 위력이 다소 떨어졌다. 그럼에도 후보자들은 시대적 흐름인 매니페스토에 대한 유권자의 요구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매니페스토를 작성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이런 효과는 종래와 달리 구체적인 수치까지 동원해 열띤 정책 경쟁을 하는 선거토론회에서 볼 수 있었으니 이는 분명 과거와 다른 새롭게 변화된 선거문화다.

한국 선거에 매니페스토가 등장한 것은 불과 4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에 대한 인지도가 30%를 넘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파급됐다. 올 2월 초만 해도 인터넷에서 매니페스토를 검색하면 불과 10여 건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수백 건이 검색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압승한 한나라당이 종래의 당선자 대회를 명칭까지 '대국민 약속실천 다짐대회'로 바꿔 매니페스토 정신을 살릴 각오를 하는 것을 보면,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매니페스토는 더욱 치열한 정책 경쟁의 화두로 등장할 것이다.

5월 11일 서울대 총장 선거에서 매니페스토를 적용, 선거 공약을 발표한 두 분의 교수가 총장 후보자로 결선투표에서 1.2위로 선출, 추천됐다. 앞으로 있을 국회의원은 물론 교육감.농협조합장 등 각종 선거에서도 매니페스토가 급격하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문화 변화를 통해 매니페스토가 한국 사회에 확산되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적당히' '대충대충'의 생활문화도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개된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문화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선거 때 참공약 여부를 따져 보는 것은 투표 시 선택 기준도 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참공약을 제시한 후보자가 선거 후 이를 과연 약속대로 실천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아무리 참공약을 제시해 당선됐더라도 종래와 같이 당선된 뒤 '나 몰라라' 하는 식이 된다면 이는 헛공약을 제시한 후보자보다 더욱 나쁜 행태다.

매니페스토의 요체는 제시된 참공약의 실천 담보다. 일본에서 2003년 지방선거에 매니페스토를 제시, 당선된 지자체장들은 매년 매니페스토 이행 여부에 대한 평가를 받고 있어 항상 긴장한다. 매니페스토는 유권자에 대한 일종의 계약이므로 매년 계약 이행 여부를 검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게 아닌가.

당선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제시한 매니페스토를 단순히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장식품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1년 뒤 매니페스토 이행 평가가 나쁜 당선자는 내년 7월 시행되는 주민소환제의 첫 대상이 될 수 있다. 매니페스토는 선거 후 당선자가 유권자에게 약속한 계약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더욱 꼼꼼하게 챙기는 깐깐한 파수꾼임을 새삼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영래 아주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