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위민 정치인가|이수근 <정치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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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야당 총재들을 비롯한 다수의 여야 정치인들이 생활고를 비관해 2살짜리 남동생 하나만이라도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음독한 10살 전후의 네 자매 음독 사건을 접하고 위로 방문과 금일봉 전달을 다투어 하고 있다.
기막힌 사연이 발생할 때마다 사후 약방문 같은 이런 단발성 일을 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고 대저 정치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어 가슴이 더욱 답답하다.
쉽게 말해 정치란 국민을 편안하게 살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가 네 자매의 슬픈 얘기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의 그늘에 빛이 들도록 그 원인을 분석, 처방전을 다각도로 강구해야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위민」한다고 그럴듯한 명분과 대의를 고창하고 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각자의 이해와 집권욕 구도에만 맞추어 움직이는 정략의 모습이 다가선다고 혹평해도 지나침은 없을듯하다.
예산 국회가 주요 정치 현안에 밀러 처삼촌 묘 벌초하듯 건성건성 넘기는게 관행이 됐고 임시 국회 역시 말만 민생 국회 운운했지 늘 해 온대로 정치 쟁점에만 매달려 싸움질이나 하다가 끝나는게 보통이다.
그러니까 서울시가 50억원의 예산을 들여 한강에 불기둥 1백40m 높이의 분수대 설치라는 불요불급한 「모양성」 사업의 추진을 발상하게도 된게 아닌가.
물론 내일의 역사를 위해 5공 비리 청산이나 전두환씨의 증언이 중차대한 역사성을 지닌 명제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보수대 연합도 좋고 중간 평가도 좋다. 또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에 쏟는 정력과 지략, 투쟁의 반이나마 소외 계층 문제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정치가 사회 갈등을 해소, 조화시키는 기능을 포기하거나 방기해 대결과 갈등을 오히려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때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혁명적 상황」이 아니라 혁명의 사태가 올뿐임을 여야 정치인들은 냉철히 인식해야한다.
통일에 대비한 민족 동질성 찾기가 요즘 한창 고조되고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아니 그에 앞서 우리 사회 내부의 동질성을 찾기 위한 정치인들의 맹성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래야만 슬픈 네 자매의 얘기로 가슴이 쥐어뜯기는 아픔도, 혁명 사태의 도래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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