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술을 너무 마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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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자정이 넘도록 아내는 남편을 기다린다. 귀를 나팔처럼 열고 대문소리에 귀기울인다. 한 점이 넘자 아내는 깜박 존다. 『문열어』 소리에 아내는 화들짝 놀라며 문을 따자 겨울 찬바람만이 쏵하며 몰려올 뿐이다. 환청이었다. 두 점이 넘어 고주망태로 돌아온 남편은 아내의 항의에 소리 높여 말한다.
『되지 못한 명예싸움, 쓸데없는 지위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가 적으니, 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술밖에 먹을 것 없지…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꾼 노릇밖에 없어….』
20년대 일제 암흑기를 산 무기력한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현진건의 단편 『술 권하는 사회』는 남편의 음주벽을 이렇듯 변호하고 있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술을 먹인다는 논리가 된다. 암울한 일제시대였으니 나라 잃은 설움을 술로 달랜다는 핑계는 그 시절로선 받아들일 수 있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오늘도 우리사회는 술로 넘치고 있다. 지난 한해 술값으로 쓰여진 돈이 놀랍게도2조원. 우리 나라 세입예산의 6분의1에 해당하고 국민 1인당 연간5만원, 매달 4천2백원을 술값으로 썼다. 마신 양은 국민1인당 맥주 50병, 소주 47·2병, 막걸리18·13ℓ, 위스키 7백㎖들이 4분의1로 집계된다. 마셔버린 술병 수가 45억6천만병. 한병 길이를 20㎝로 잡고 연결하면 91만2천㎞의 거리, 지구에서 달까지 왕복하고 다시 달 가까이 가는 거리가 된다. 경부고속도로에 깔면 1천63번을 왕복하는 거리다.
국민 1인당으로 나눈 음주량을 20세 이상의 성인음주량으로 고쳐본다면 평균 2배의 수치가 나온다. 맥주 1백병, 소주 94·4병이 된다. 왜들 이렇게 마시는가. 마셔도 너무 심하게 마신다. 몇 해 전 갤럽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과음을 하며 술로 인한 가정불화가 5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보다 앞서 세계보건기구가 분석한 보고서에서 한국을 「세계 제1의 음주국」으로 공개했을 때, 사실과 다르다는 논란이 일면서 많이 마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계 제1위는 아니라는 겸연쩍은 통계가 나온 적도 있다.
왜 술을 이토록 과음하게 되는가. 술을 권하는 사회 때문인가. 경쟁과 갈등의 산업화시대를 살면서 쌓여지는 스트레스 해소가 음주의 논리다. 전장을 방불케 하는 수출전선, 기업의 현장. 직장내부의 경쟁적 업무와 갈등이 가져오는 지친 피로를 해소하는데 있어 한잔의 술은 청량감을 준다. 또는 폐쇄회로의 닫혀진 단조로운 일상에서 만나지 못했던 친구·선후배·동료들간의 화목한 술자리는 삶의 테두리를 넓혀주는 역할마저 할 것이다.
문제는 과음이다. 술이 술을 마시는 습관성 과음이 세상을 비리성으로 만들고 가정을 황폐화시키며 개인을 병들게 한다. 한창 일할 나이의 40대 남자들의 사망률이 인구1천명 당 8명, 그중 간암에 의한 사망률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40대→격무→과음→죽음이라는 등식이 통계적으로 입증된다.
이러한 과음의 사회학은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넓게는 경쟁과 갈등의 산업화시대, 삭막한 도시생활이랄 수 있겠고 또 한가지는 대인관계의 그릇된 접근 방식이다.
바이어를 술로 떨어지게 하고 이해관계자를 술과 돈으로 매수하며 술을 진탕 먹여야만 허물없는 관계가 형성된다는 「관계의 촉진제」로 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국민 1인이 한해동안 읽은 책은 3·75권, 월도서 구입비는 8백77원이라는 황량한 문화풍토 속에서 2조원에 이르는 45억6천만병의 술을 계속 마셔대야만 할 것인가. 『모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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