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 통화흡수도|가계·기업에 주름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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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부가 과잉유동성 흡수를 위해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이규성 재무장관이 9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놓은 통화수습대책의 골자는 크게 보아 통화안정증권 등 통화채의 발행과 대기업의 은행 및 상환 등을 통해 이미 풀린 돈을 거둬들이고 민간여신을 대폭 줄여 새로 돈이 풀려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금융 자율화라는 대전제에 스스로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통화관리를 사실상 내팽개치다시피했던 정부가 이같은 강력한 대책을 내놓기에 이른 직접적인 까닭은 지난 1월중 총통화가 작년말(48조9천3백88억원)에 비해 1조2백17억원이나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잔 증가율이 작년말 18·5%에서 20·2%로 급등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같은 과잉유동성은 대북방 교역확대 등에 편승, 투기자금으로 변해 전국도처의 땅값·아파트 값을 부추겨 안정기조를 크게 위협하며 애써 잡아놓은 인플레심리를 자극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게다가 이런 상태를 방치할 경우 국제수지흑자에 따른 해외부문에서의 통화증발이 불가피한 여건인만큼 2∼3월중 만기가 도래하는 통화채권(4조2천1백억원)을 전액 재발행한다 치더라도 매월1조∼1조3천억원씩 총통화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재무부의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총통화증가율은 1월에 이어 지속적으로 20%를 훨씬 웃돌 판이다. 정부의 이번 긴급통화관리대책은 이같은 절박한 사정을 배경에 깔고있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회의와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있다.
무엇보다도 이번처럼 일시에 돈줄을 죄는 것이 국민경제를 위해 바람직하겠느냐는 지적이다.
정부는 그동안 금융자율화라는 명분에 묶여 통화관리의 타이밍을 놓쳤다고 할수 있다.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일시에 통화흡수에 나섬으로써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하게 된다면 그뒷 수습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얘기다.
호미로 막을 일을 실기를 해 가래로 막는 형식이지만 막을 수 있다해도 거기에서 오는 부담으로 걱정이 태산인 꼴이다.
이장관은 이 대책을 발표하면서 1월에 20·2%를 기록한 총 통화증가율을 어떤 일이 있어도 3월까지는 18%선으로 끌어내리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 우선 2월중 만기도래분 2조5천억원을 전액 재발행하고 새로 1조5천억원의 통화조절용 채권을 발행, 모두 4조원규모의 통화채권을 발행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총통화 증가율이 목표대로 잡히지 않을 경우 3월중 만기가 돌아오는 1조8천억원어치를 재발행할 것을 미리 예고했다.
이처럼 방대한 통화채를 소화하기 위해 제2금융권은 물론 각종 공공기금의 자금까지 동원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같은 방대한 자금을 조달하게 되는 쪽에는 그늘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재무부는 지난1월 3조2천억원에 달하는 통화조절용 채권을 제2금융권에 할당할 때, 사실상 강제인수를 시킴으로써 보험회사들이 자금경색으로 대출을 줄이는 등 비명이 나오고 있다.
이번 조치가 보험·단자뿐 아니라 증권시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간부문으로 흘러가는 돈줄을 죄기 위해 2∼3월중 민간대출 증가액을 지난1월중 9천억원에서 월5천억∼6천억원으로 억제할 방침이어서 서민금융 역시 자금사정이 빡빡해질 전망이다.
또 대기업에 대해서 이미 지난8일부터 시행하고있는 상업어음 및 수출산업, 소재·부품산업 시설자금의 한은 재할 폐지와 함께 현재 50%인 중소기업에 대한 재할도 축소할 계획이어서 앞으로 자금사정 악화에 따른 기업들의 어려움도 예상된다. 게다가 대기업의 경우는 연말까지 1조여원에 이르는 은행빚 상환까지 의무화될 예정이어 자금사정 악화는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밖에 재무부는 1·4분기중 예정되어있던 2천억원의 재정지출도 2·4분기로 미루기로 함으로써 이 부문에도 주름살이 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주름을 예상하면서도 정부가 통화관리에 강경한 자세로 나온 것은 안정기조의 유지가 그만큼 중요하며 더 이상 시기를 늦출수 없다는 상황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각 부문에서 제기될 반발과 저항을 정부가 얼마나 슬기롭게 이겨내느냐에 있다고 할수 있다. 또 통화의무 조건억제에 치중한 나머지 생산활동을 위축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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